삶의 애환을 토닥여 주는 투박하지만 정겨운 소리

달 밝은 겨울 밤. 야삼경(夜三更)만 되면 어김없이 토닥토닥, 다듬이 소리가 담을 넘어 온 마을에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물결의 파장처럼 천천히 그리고 잔잔하게 또 고요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다듬이 소리에 아기들은 곤하게 잠이 들고 마을은 더욱 깊은 밤의 평화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정작 다듬이질을 하는 우리네 어머니들은 결코 잠들 수가 없다.
한 나절을 꼬박 시부모님 공양에, 자식들 뒷바라지, 온갖 궂은 집안 일에 심지어 농사일까지 거들면서 낮에는 허리 한번 제대로 펼 틈도 없지만 그렇다고 밤에 쉬는 것도 아니다. 저녁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찬물에 손을 넣고 설거지를 후딱 해치운 다음 서둘러 다듬잇돌 앞에 앉는다.
다듬이 방망이를 양손에 하나씩 쥔 어머니들은 매운 시집살이의 설움을 방망이에 실어 다듬잇돌을 힘껏 두들겼다. 옷감의 꾸깃꾸깃한 주름이 다듬이질에 곧게 펴지 듯 그네들의 시름도 다듬이 소리와 함께 밤하늘로 올라가 애환(哀歡)의 별이 될 수 있도록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그리고 다시 날이 밝으면 남편과 자식 걱정으로 또 하루를 열심히 사는 우리 어머니들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그랬다. 그렇게 다듬이 돌처럼 평생을 참고 견디며, 또 인내하며 살았다. 과거, 친정아버지들이 출가한 딸네 집을 처음 찾아 갈 때 잊지 않고 꼭 챙겨 가는 물건이 바로 이 다듬잇돌이었던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된 시집살이를 돌처럼 잘 참고 꿋꿋이 견디라는 부정의 표현으로 친정아버지가 딸에게 주는 선물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다듬잇돌을 인고침(忍苦砧)이라고도 한다.
보통 다듬이질은 설이나 추석 등과 같은 명절, 혼사(婚事), 그리고 겨울을 앞둔 늦가을에서부터 초겨울까지 많이 이뤄지는데, 그 기간에는 어떤 집이건 밤이면 다듬이소리가 끈이질 않았다. 우리 조상들이 유난히도 이 기간에 다듬이질을 많이 한 이유는 물론 그 기간에 새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이 많이 필요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시절 대부분의 옷감이 명주, 삼베, 모시 등과 같은 식물성 섬유였기 때문이다.
식물성 섬유는 세탁 후 부피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듬이질을 통해 줄어든 천을 원상태로 늘리고, 올을 바르게 하고, 천을 매끄럽게 하여 때가 덜 묻게 하는 등 다듬이질이 필수다. 특히, 이불 홑청의 경우는 빨래를 한 다음 비틀린 부분을 양쪽에서 잡아당긴 다음 다듬이질을 통해 주름을 펴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들은 매번 새것처럼 까슬까슬한 이불에서 잠을 청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다듬이질을 하기 위해서는 다듬이 도구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데 아무 방망이와 다듬잇돌로는 좋은 다듬이질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방망이는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에서 주인공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손잡이에서 갈수록 방망이의 배가 적당히 부른 것이어야만 옷감을 두들기기가 용이하다. 다듬잇돌은 장방형으로 크게 나무와 돌, 두 가지가 있는데 나무는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박달나무와 느티나무 등이 주로 쓰였고, 돌은 화강암, 대리석 등이 널리 사용됐다. 또한 윗면은 매끈하면서도 밑변보다 약간 넓어야 하며, 밑변의 양쪽에는 들기 편하게 양쪽에 홈이 파여져 있어야 한다.
한편, 다듬이질은 혼자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두 사람이 다듬잇돌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두들기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이때 방망이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옷감이 최대한 상하지 않는 것, 다른 말로 구김이 얼마나 잘 펴지냐는 순전히 두 사람의 호흡이 얼마나 척척 잘 맞는지에 달렸다.
해서, 예로부터 동네에서 사이가 안 좋기로 소문난 고부(姑婦)간이나 동서(同壻)지간이라 해도 다듬이 방망이를 손에 잡은 순간만큼은 서로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의 호흡에 맞추도록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그 동안 서로에게 쌓인 무거운 마음의 갈등 또한 자연스레 풀어 버렸다. 옷감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실타래도 함께 풀어주는 고마운 효자(孝子)역할을 톡톡히 해온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바로 이 다듬이질이었던 셈. 또 한가지, 이웃간에도 품앗이로 서로 도와가며 했기 때문에 이야기꽃을 피우며 잠시나마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도 있는 것 역시 다듬이질이 주는 덤이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로 우리네 여인들의 생활에서 도움을 주고, 그 자체가 생활의 일부분이던 다듬이도 산업화 시대 합성 섬유의 발달과 옷감의 후처리 가공법의 발달에 따라 나일론 등 인존 섬유가 유행하면서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갔다. 더욱이 다리미가 나오고 세탁소에서 다림질까지 대행해 주면서 지난 6,70대를 고비로 다듬이는 점차 우리들의 기억 속에나 나올법한 한국의 사라져간 명물(名物)로 인식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다듬이질 소리를 이제 더 이상 도심에서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영상매체에서 녹취된 것들을 다시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을 안고 과거에 쓰이던 다듬이를 볼 수 있다는 황학동 벼룩시장 골동품 가게들을 찾았다. 허나, 10군데 됨직한 골동품 가게 중에서도 일부 가게에서만 다듬이를 겨우 볼 수 있었다.
한 골동품 가게 주인은 “요즘 이런 걸 누가 사갈려고 하나? 내가 어릴 때만 할머니의 다듬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곤 했는데 말야. 그만큼 나한테 친숙한 소리가 이 다듬이 소리였어”
양천구에서 벼룩시장을 찾은 송춘화(42)씨 또한“제가 처음 시집 올 때만 해도 시어머니랑 가끔씩 다듬이질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다듬잇돌만 겨우 집에 있을 뿐 일체 사용하지는 않아요”
세상엔 널리 잘 알려진 타악기부터 그 나라만의 전통적인 수천, 수백 가지의 타악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다듬이 소리만큼 우리의 청각을 적극적으로 자극하는 소리는 아마 없을 것이다.
토닥토닥, 단조로운 리듬에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다듬이 소리에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의 애환이 물씬 묻어 있는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다듬이 소리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 또한 어쩌면 우리가 한국인이기에, 또한 어머니를 항상 마음의 고향으로 그리워하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박정길 기자>
<박정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