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들이 자랑하는 세 가지가 있다. 지하철, 극장, 박물관이다. 러시아 지하철의 역사는 60년이 넘었지만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비극이 한번도 없었다.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얘기다. 9백여 만 명이 살고 있는 모스크바에는 크고 작은 극장들이 백 개가 넘는다. 하나같이 성채 같은 우리의 극장들(예술의 전당, 현대미술관, 세종문화회관)과는 달리 모두가 나름대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건물들이다. 이곳에선 일년 내내 연극과 오페라와 발레가 상연된다. 식물, 동물, 광물, 우주 등 각 분야에 관련된 박물관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환경 친화적으로 들어서 있다. 그러니 자랑할 만도 하다. 나는 여기에 한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러시아의 공공도서관이다. 각 지역과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김없이 아담한 공공도서관이 있고, 이곳에는 여러 종류의 잡지에서부터 교양 및 전문 도서들이 알뜰하게 비치되어 있다. 공공도서관은 마을 주민들의 문화 센터이고 지식의 보고이다.

그래서일까? 러시아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디에서나 책을 읽는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이후 사회·경제적 혼란 속에서 문화예산이 삭감되고 문화인프라가 급격히 무너지는 바람에 지금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극장, 박물관, 도서관은 여전히 러시아의 자랑거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것들이 러시아를 문화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김영삼의 문민정부도 김대중의 국민정부도 하나 같이 문화입국을 강조했고, 문화예산을 대폭 증액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문화체감 온도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이 땅의 문화공간은 학생들과 보통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엔 여전히 너무 멀거나 높다. 현대미술관과 몇몇 박물관은 차가 없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 천만 명이 사는 서울에는 연극과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는 극장과 괜찮은 미술관이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목 좋은 자리에는 어김없이 술집, 음식점, 카페, 여관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입국이 아니라 마치 유흥입국의 형국이다. 이런 자리에 어찌 문화가 꽃필 수 있을까?
우리의 문화인프라 중에서도 가장 빈약한 것이 공공도서관이다. 한국도서관 통계(2001년)를 보면 1993년에 전국에 총 277개이던 공공도서관이 2001년에는 420개로 늘어났고, 공공도서관의 예산은 이 기간 동안에 760억에서 840억으로 증액되었다. 언뜻 보아 외적으로 성장한 것 같지만, 이 숫자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서울시를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천만의 시민이 사는 서울시 27개 구에 공공도서관은 2001년 기준 총 36개에 불과하다. 한 개 구에 공공도서관이 1.3개 꼴이고, 공공도서관 1개당 인구 29만 명이 할당된 셈이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부끄러움을 넘어 참담하기까지 하다. 서울시 공공도서관에 비치된 도서는 대부분 철 지난 책들이고 1인당 도서는 0.4권에 불과하다. 다른 시, 도, 군의 공공도서관 상황도 서울시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장서의 부족과 빈약한 공간 문제 말고도 이미 우리의 공공도서관은 빌 게이츠를 키운 책의 향기 가득한 지식의 공간도,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삶의 자양분을 얻는 문화공간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저 영어 책 펴놓고 각종 시험공부를 하는 생존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사정은 대학도서관과 학교도서관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노무현 정부도 역시 문화입국을 내세우며 영화감독 출신 인사를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문화입국은 장관 하나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예산의 확충을 통해 문화인프라를 지속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이 일은 국립극장, 공공도서관, 국립미술관, 국립박물관을 건립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도 목 좋은 곳에 건립하여 국민들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이 문화공간을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문화를 자연스럽게 즐길 때, 문화공간을 문화공간답게 만들 때 문화입국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누가 대한민국의 자랑거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지체없이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극장이라고 대답하는 행복한 나를 꿈꾸어 본다.

이항재<인문과학대학/어문학부/러시아전공>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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