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초가 되면 정부 각 부처에서는 한해의 정부사업을 보기 좋은 포장지로 단장하여 공개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통신기술을 연구하는 한 연구소에서는 3200억을 투입하여 연구의 성공여부가 불확실하며 투자위험도가 높지만 산업파급효과가 큰 대형-장기 국책과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키로 하겠다고 발표했고 그간의 연구 결과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테라급 전광회선분배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소식도 발표되었다.
이 기술은 광신호를 전기신호로 변환시켜 분배한 후 다시 광신호로 변환하여 분배하던 기존의 광신호분배 방식과는 달리 광신호를 전기적으로 변환과정 없이 직접 제어분배 할 수 있어 광신호 분배과정에서의 신호적체를 줄임으로써 초고속 통신의 원활한 전송을 가능하게 하여 광통신망 구축비용을 80% 이상 낮출 수 있다고 한다. 이 기술은 우리 나라도 루슨트테그롤로지스나 노텔 등과 같은 선진국 장비업체와 대등한 수준이 될 것이며 광인터넷 기간망 부문에 세계시장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광통신장비의 국산화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이하의 상황에서 이런 기술이 개발되었다니 그 기술을 개발한 연구진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선다. 원활한 물류 수송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넓은 고속도로 건설과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온 후의 지방도로 확장과 정비도 필요하다. 통신망에서 지방도로에 해당하는 광가입자망, 즉 우리 가정으로 연결되는 광통신망의 도로사정은 어떤가.

요즘 TV 광고를 보면 인터넷 속도가 극한치를 치닫고 있는 듯하다. 50 Mbps의 최고 전송속도가 가능하다며 새롭게 서비스가 시작되고 있는 초고속디지털가입자회선(VDSL) 광고들은 “절대 속도”니 “미친 속도”니 하며 소비자를 그들의 시스템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가입자회선(xDSL)은 진정한 광통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기술은 전화선 즉 광섬유가 아닌 구리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과 사무실의 PC는 광섬유에 의한 빛의 전송으로 통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리선을 통해 전송되는 전기신호를 쓰고 있는 때문에 VDSL로 연결된다 해도 평균 전송속도는 10 Mbps 정도일 것이다. HDTV나 디지털 영상서비스등 대용량 실시간 멀티서비스를 제공받으려면 광섬유를 이용한 광가입자망(Fiber To The Home: FTTH)이 실현되어야 한다.
KT가 한 벤처기업과 함께 100 Mbps의 전송속도를 안정적으로 서비스 할 수 있는 파장분할다중방식 구동광네트웍(WDM-PON)을 이용하여 FTTH를 실현하겠다고 한다. 이 기술이 실현될 경우 IT강국으로 명성과 지위가 유지될 것이라고 KT는 말한다. 네트웍 기술도 중요하다. 그러나 네트웍을 구성하는 부품에 관해서는 “누가 어떻게“ 라는 의문의 소리조차도 별로 없다. 다만 한 지방자치단체가 그 일을 맡고 있을 뿐이다. 광가입자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네트웍 시스템과 PC를 연결해주는 광통신의 동맥 역할을 하는 광섬유 또한 광통신망 구축에 필수적인 부품이다. FTTH에서 쓰일 광섬유로는 광가입자망에 적절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폴리머 광섬유가 쓰일 것이지만 국내에서는 상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폴리머 광섬유 제조기술의 지적소유권이 대부분 일본에 있다.
15년 전부터 일본의 한 사립대학에서는 당시 전혀 상업적인 연구가치를 기대할 수 없었던 폴리머 광섬유 분야에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결과는 전 세계 광통신망의 실핏줄인 가입자망에 그들의 광섬유가 연결될 날만 남겨 놓고 있다. 국내 몇몇 기업들도 3년여 전부터 폴리머 광섬유를 개발하고 있지만 단순하게만 보이던 광섬유 제조기술이 그리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우리기업의 독자적인 연구 개발이 1-2년 내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FTTH 구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의 폴리머 광섬유를 수입해야 되는 상황이 올 수 도 있다.
과거 우리는 자동차를 만들어 팔면서 엔진을 비롯한 다른 여러 부품을 외국에서 들여와 조립하였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의 우리의 광통신장비가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소위 굴뚝산업에서는 생산품을 보고 제조기술의 예측이 가능하였다. 다시 말하면 외국 기업의 제품을 보고 복사가 가능하였다. IT산업에서는 자체 연구개발 없이는 어떤 형태의 제품도 생산이 불가능하다.
정부의 거창한 연구계획에 묻히고 번거롭고 당장 연구 결과물이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은 부품 개발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기업에서 돈벌이가 잘 된다고 하여 공공연구소에서 3200억의 연구비 중 일부를 투자하여 벤처기업들이 잘 해나가고 있는 게임산업에 참여해서도 안 된다. 과거 대기업이 기업의 윤리를 저버리고 중소기업 고유직종까지 확장한 결과로 재벌구조 조정이라는 철퇴가 내려지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최재호<전자물리학전공/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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