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 오메데 오. 이이나즈(약혼 사 )가 잇나보에 그러. 움 나루호도(그러려니).··· (중략) ··· 뎡신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 고 명년 미국 간다 그 쳐녀로구먼. 베리 .(강조점은 인용자 주)”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에서 얼개화꾼인 신우선은 김장로의 집을 찾아가는 이형식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한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나오는 신우선의 말만으로도 1910년대 말 경성 지식인들의 국제적인 감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조선어와 일본어 영어가 혼재되어 사용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식민지 도시 경성에서 언어 또한 유행 중의 하나임을 목격할 수 있다. 대팻밥 모자를 걸친 신우선의 모습은 아직 댄디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30년대 경성의 거리를 배회하는 댄디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근대적인 제2차 산업의 미발전이 3차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대비되는 경성에서 국제성은 여학생의 복장에서, 기생들과 카페의 여급들의 외장을 통해 드러난다. ‘무정’에서 기생인 영채가 여학생의 복장과 머리를 하는 것도 전대와는 다른 어떤 유행이 복색을 비롯한 외장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영채의 히사시가미(庇髮 : 앞머리와 옆머리를 앞쪽으로 모아서 묶은 머리 모양으로 1905년경부터 일본 여학생들 사이에 유행하여 1910년대 조선의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머리와 짧은 치마, 그리고 높은 구두와 양산으로 치장한 외장은 1910년대 여학생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국제성은 항상 유행적인 현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왔으며, 이는 상품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봉건 왕조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궁궐보다 높은 건물이 들어서는 식민지 사회의 현실은 전대의 지배질서를 벗어나는 현상이 나타난다. 소비할 수 있는 자격은 신분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금전에 있는 것이다. 소비문화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1930년대의 경성에서는 이미지에서 파생되는 교환가치와 특화된 기호가치가 난무하게 된다. 사물의 사용가치가 사라지는 곳에서 문명을 표방한 국제성은 유행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이다.
1930년대 들어 기존의 신문 등이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증면하고, ‘별건곤’, ‘삼천리’, ‘여성’ 등의 잡지가 새롭게 발행되면서 일본과 서구의 상품광고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현실은 소비자본주의의 국제성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더군다나 영화산업의 성장과 더불어 서구에서 수입된 영화의 이미지들은 영화라는 근대적인 미디어를 통한 유행을 확산시켰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빠른 시간에 유통되는 근대적인 미디어의 특성상 영화는 원산지에서 조선의 영화관으로 유입이 단시간에 이루어지면서 영화 속의 이미지는 파리, 뉴욕, 동경, 경성에서 공통된 근대적 감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실체의 자연스런 표상이 단절되고 외연만이 부유하는 곳에서 등장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은 경성이라는 도시가 탄생시킨 실체였다. 이들은 영화관에서 사랑을 나누며,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과시했다. 영화 속의 이미지를 실천하는 주체인 이들이 거리를 거닐 때 경성의 밤거리는 그야말로 모던한 서구 도시의 이미지들이 활동사진처럼 겹쳐지는 곳이 되었다. 바야흐로 소비의 국제화는 영화에서 파생되어 일상의 공간으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들을 체현하는 자신이야말로 근대적인 인간임을 자부하는 것으로 생각한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은 유행의 국제성을 주도했던 움직이는 표상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얼개화꾼 신우선은 계몽이라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완전한 댄디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유사 댄디즘은 얼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히려 신문과 잡지의 학예면을 장악하고 있던 문인기자들과 이에 글을 기고하는 문사들은 댄디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했다. 이는 산업화에 기반을 둔 근대적인 사회로의 이행보다 먼저 찾아온 소비자본주의의 휘광이 찬란한 식민지 조선에서 경박함이라는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자신의 자존심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우위를 지향했으며, 고고한 자존심을 드높이며 자신들의 의미영역을 찾았다. 이는 문사로 지칭되는 계층에서 두드러지게 표상화 되었다.
이들이 머물면서 자신들의 문화적인 취향을 만족시켜 준 다방은 모던족들의 영화관만큼이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칼피스(醱酵乳 : 요구르트의 일종)를 왠지 음탕하게 보는 소설가 구보의 시선처럼 커피와 담배, 그리고 레코드를 통해 듣는 음악은 그들의 정신적 우위를 드러내는 기제였던 것이다. 열대 식물이 놓여져 있는 푹신푹신한 쿠숀 위에서 차와 담배를 즐기면서 하는 사색과 글쓰기는 대중적인 감수성과는 거리를 둔 상징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차별성을 강화시키고자 한 공간에서 음주로 인한 소란 행위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꿈꾸는 다방은 도회 속에 있는 문방(文房)이자 한거지(閑居地)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다방 또한 서구의 카페가 유입되어 나타났다는 점에서 유행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구의 카페가 예술인들의 사교공간이었던 것처럼 1930년대 경성의 문인들도 서구의 문화를 유행처럼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서구의 카페가 차 이외에도 술을 취급했던 것에 비하여 경성의 다방은 술을 배제하고자 했다는 점이 차별적이다. 그러나 초기 문학 예술가들에 의하여 운영되던 다방들이 경영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고, 이곳에서도 술을 판매하면서 정신적인 우위를 자부하던 댄디들의 공간은 모던족들의 공간으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대중사회의 출현 이후 문화의 차별성을 통한 문화적 자의식은 소비자본주의의 상품적 가치에 귀속되면서 유행의 운명을 다 한다.
<장두식>  (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