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고려대 독문학과 졸
- 동아방송 기자
- SBS정치부장, 보도국장, 대기자 보도본부장
- LA지사장

1975년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던 어느 날, 기자가 되려는 입사 시험을 보았다. 입사시험을 위해 준비해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유신독재와 군화발 소리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겨울 같은 스산함만을 느끼며 우울한 날들을 보낸 기억이 대부분이다.
우연인지 다행인지 논문의 제목이 ‘겨울’이었다. 왜 출제자는 그리도 흔하고 상식 이하의 질문인 겨울을 꺼내 놓고 기자가 되려는 철없는 아이들을 평가하려 했을까?
머리가 길어도 잡아가고, 치맛단이 짧아도 잡아가고, 심지어 대학생들이 미팅을 가도 풍속사법이라며 구류를 살리던 바로 그때, 겨울은 더없이 추웠고, 떨리는 세월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벌써 30년. 올해도 우리는 신입 사원 10명을 뽑았다. 소위 수습 기자들이다. 어찌 사람의 됨됨이를 지금 볼 수 있는 것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만은 뽑혀야 할 수습의 입장에서는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었으리라.
토플 성적을 기본으로 하고, 카메라 테스트와 리포트 실기, 기사작성의 이해, 논술, 상식과 기초면접 그리고 테스트의 하이라이트인 2박 3일 합숙평가. 밤새 토론하며, 노래하고 술잔을 기울인 뒤, 야간 산행까지. 물론 이 합숙평가는 풋내기 기자들을 필드에서 직접 가르친 젊은 선배들이 맡는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평가 자료가 바로 이 과정이다. 여기에서는 대학 4년에서 배운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인생관, 가족관, 연애관, 심지어 인간인 나와 또 다른 인간인 너가 맺은 인연이 앞으로 남은 우리들의 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작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밤을 새워 얘기한다. 그리고 며칠 뒤 최종 면접 시험을 치른다

열명 가까운 면접관들 눈에도 단연 한 명의 산골학생이 주위를 끌기에 충분했다. 지방 대학생이라고 기죽지 않고 왜소해 보여도 주눅들지 않은 단단함. 외국연수는 형편상 생각을 못해 봤지만 대학 4년을 한가지 목표를 세워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자신을 채찍하며 열심히 살겠다는 신선한 젊음을 회사는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물론 회사의 성격에따라 사원선발 기준도 다르겠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매서운 바람 부는 겨울 벌판에 홀로서 있다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가야할 길을 찾아 나서는 자신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회사가 가장 싫어 하는 모습은 나약함이다. 도전해보기도 전에, 구실을 만들어 스스로 뒷 걸음질 치는, 그 결과 내가 어디를 어떻게 가야할지를 제대로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 적당히 젊음을 소진해버리는 것 말이다.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할 때 성공한 많은 동포들을 만나봤다. 물론 가정형편이 넉넉해서 처음부터 쉽게 미국 생활에 적응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포들은 몇 차례나 죽음을 생각했거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이었다. 흑인 빈민가에서 권총을 품에 안은채 내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가 하면, 휴일도 업이 물집이 생기도록 세탁기를 돌리거나 재봉틀을 돌리는 사람, 비린내 나는 생선을 수도 없이 만지거나 닭의 목을 자라 내야하는 동포들.
자식을 위해, 형제를 위해, 부모를 위해,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정열을 불태웠다는 자기 자신의 승리를 위해, 안주하는 삶을 사치로 돌리고 이민의 길을 택했으리라. 또한 겨울을 맞으며 찬란한 봄을 고대하는 뭇 젊은이 있다면, 뒤돌아 볼 것 없이 자기의 틀을 깨고 훌훌 떠난 것을 권하고 싶다. 지금보다 좀 더 넓고 높은 곳을 향해, 어둡고 힘든 초행의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비록 좁고 멀다 해도 그 곳이 시골이든 산골이든, 아프리카이건 멕시코이건 졸립고 권태로운 한곳에 안주하지 말고 서둘러 길을 나서는 자만이 가능성을 진단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연유에서 그래, 우리들을 시험들게 한 제목이 ‘겨울’이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어쩌면 나라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무한 인생을 개척해 나가라던 그래 겨울 산사(山寺)의 종소리가 가을을 다 보내며 그리움 같이 스며든다.
하금열  SBS보도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