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으니 신발 안으로 흙이 자꾸만 들어온다. 발에 꼭 맞는 신을 신어도 모래 몇 톨 스며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흙을 딛고 나갈 때마다 모래 알갱이들은 제각각 자리를 찾아가듯 신발속으로 스며들었다. 발가락 사이와 발바닥, 발뒤꿈치에 자리를 차지한 모래들은 신을 벗기 전까지는 제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 그러니 발을 씻지 않을 수 없었고, 씻기 전 까지는 흙과 함께 지내게 된다.
한참을 걸으니 이번엔 신발 안에 물기가 가득했다. 땀이다. 발바닥의 땀도 걸음을 거들었는지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
조금 빠르게 걷다가 발을 헛디뎠다. 미끄러져 고무신이 벗겨지고 말았다.
걷다가 개울을 만났다. 신을 신은 채 무작정 발을 담갔다.
“첨벙첨벙”
발을 담그고 흔들었다. 모래 알갱이들이 박힌 발가락 사이로 개울물이 들어왔다. 그러고 나니 한결 걸음을 옮기기 편했다.
“뽀드득, 뽀드득.”
걸을 때 나는 소리 또한 듣기 좋았다. 이제야 발이 고무신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치 못했던 우리네 부모들이 어렸을 적, 부모의 부모는 고무신 한 켤레를 사기 위해 몇 달을 일해야 했다.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벅찬 60년대에 찢어질 때마다 사게되는 고무신 한 켤레는 그야말로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양말을 기워 신는 것은 물론, 헤진 옷도 기워 입고 덧대어 꿰메 입었던 터라 신발도 예외가 아니었으리라.
그래도 해마다 추석이 되면 새 옷과 새 고무신을 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연중 행사를 위해 할머니는 한달 전부터 작년에 입던 옷을 입혀보고 신발도 신켜보고, 상태를 점검 한 뒤 윗 형제의 옷을 물려받을 사람과 새 옷을 입을 사람을 결정한다. 할머니의 심중을 모르는 우리의 부모들은 추석 전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막상 자신에게 돌아올 새 옷이나 신발이 없으면 금새 실망하여 토라지곤 했단다.
고무신의 추억을 묻는 내게 석영복(68)할머니는 “고무신을 신기전에는 ‘게다’라는 신발을 신었었지. 외형은 지금의 슬리퍼와 똑같은데 바닥은 나무고, 발가락과 발등을 덮는 곳은 고무로 되어있어. 그 둘을 못으로 박아 연결한 신발이었는데 고무신이 비싸서 주로 이걸 신었었지. 고향(평양)에서 겨울에는 항상 대동강이 꽁꽁 얼었는데, 걷다보면 미끄러져 못이 빠지기 일쑤였지. 고무신을 신고 난 뒤는 그런 불편도 없고 발이 덜 시렸는데 그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구나”라고 회상한다.
흙, 물과 함께 두세 달만 다녀도 고무가 삭기 시작한단다. 걷다가 행여 큰 돌맹이나 뾰족한 나무등걸을 만나게 되면 금새 찢어져 버린다고 하니 꿰메어 신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장난꾸러기들은 새 신발을 신기 위해 작전을 시작한다. 어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신발 찢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들키지 않도록 조금씩, 조금씩 찢어 나간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한 곳에 모여 야금야금 찢는다. 그 일이 있고 난 며칠 뒤, 어머니께서는 장에서 새 신발을 사온다.

아버지에게서 고무신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신던 고무신을 벗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물이 들어가도 스며들지 않기에 작은 물고기의 어항으로 쓸 수 있을 것 같고, 뒷부분을 접어보니 종이배 모양이 되었다. 너덜너덜해져 못신게 된 고무신에 흙을 넣고 꽃을 심어 작은 화분으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또, 비상시에는 좋은 무기도 될 것 같았다.
“학교에 신발장이 있어서 신발을 정렬해 놓았었는데 새거다 싶은 고무신은 도둑맞기 일쑤였어. 귀한 고무신을 잃어버리면 혼날까봐 남의 고무신을 몰래 가져오기도 했지.”
보통 학교가 집에서 먼 거리에 있어 신발이 꼭 필요했기도 하거니와 때로는 놀잇감도 되었다. 가을이면 고무신을 던져 나무의 열매도 딸 수 있었고, 사내아이와 싸울 적 고무신을 쥔 손을 풍차처럼 돌리며 쫓기도 했다고 하니 고무신은 그 당시 아이들에게는 재산목록 1호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학교 때 고무신이 닳을까봐 맨발로 다닌 적도 있었지. 그 당시만 해도 흰 고무신은 찾을 수도 없었고 검정고무신도 너무나 귀했어”라며 유명 메이커만 고집하는 나에게 할머니께서는 앞이 터져 엄지발가락이 삐죽이 튀어나오는 고무신을 신기고 싶어했다.
체육시간에는 빨리 걷기만 해도 벗겨지는 고무신을 신고 운동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운동용 덧버선을 만들어 신기도 했지만 그 보다 맨발을 더 좋아했단다.
나도 얼른 신던 고무신을 벗어 맨발로 땅을 디뎌보았다.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발바닥이 따끔거린다. 조금 지나니 맨발로 걷는 것이 적응이 되었는지 폭신폭신해 진다. 맨살과 흙이 닿는 감촉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그대로 흙 아니,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참을 신으니 발에 자극이 없는 고무신이 편하다. 공산품들이 많이 발달해서 기능성 운동화, 발의 체형에 맞춘 슬리퍼나 구두도 나와 굳이 고무신을 신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고무신을 신고 걷는 느낌은 신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언젠가 다시 불암산을 오를 때 오늘 처음 신어보았던 고무신이 생각날 것 같다.
한 켤레의 고무신 앞에서 ‘고무신 세대’가 아닌 나도 어느새 그 때의 추억 속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세월이 가면 고무신도 사라지고 고무신 세대도 잊혀지겠지만, 우리네 부모들마저도 그 옛날 고무신의 추억을 잊는 건 아니겠지.
<어우주 기자>  universe@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