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서울 법대 및 동 대학원 졸업/경희대학교 법대학장 및 대학원장/대한 국제 법학회 회장/외교 통상부, 국방부, 해양수산부 정책자문위원/저서:국제법개론, 국제기구론, 법학통론 등 다수

세월은 가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시간은 가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세월이나 시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세월을 가는 것으로 보면 대비가 없어도 되지만 오는 것으로 보면 대비가 있어야 한다.
세월을 가는 것으로 보면 가 버렸기에 준비가 필요치 않지만 오는 것으로 보면 멀지 않아 올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어떤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력하고 저축하고, 오늘이 고생스러워도 이를 참고 견뎌내는 것은 밝은 내일이 오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건 기업이건 개인이건 할 것없이 장단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시간이 오는 것으로 보는 까닭이다.
인간이 시간을 알게 된 것은 놀라운 발전이다. 춘하추동의 변화, 일월성신의 운행을 통해 시간을 인식했다면 시간은 원 운동이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시간의 흐름을 나선형 운동 내지 직선운동으로 본다. 역사는 전진한다고 생각하지 원점으로 되돌아 간다고 생각지 않는데서 그것을 보게 된다.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은 동양보다 서양이 더 철저한 것 같다. 영어를 두고 보더라도 시간의 단위에 동양에는 없는 week, fortnight, century, millennium이란 것이 있다. week는 7일을 말하고 fortnight는 2주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하루가 일곱 또는 열넷 모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로 되어 있다. 백년을 의미하는 century, 천년을 뜻하는 millennium이라는 것도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인 것이다.
우리말에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있고, 일년의 계획은 정월 초하루에 있다”(一日之計 在朝, 一年之計 在元旦)는 말이 있거니와 이것은 아침 또는 정월 초하루를 단순한 시간의 연장선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계획, 새로운 포부를 다짐하는 특별한 시작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시간의 단위에 이러한 의의가 있는 것이라면 시간의 단위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각오, 새로운 다짐은 그만큼 발전의 촉진제가 될 것이며 서양이 동양에 앞선 것도 이러한데 한 이유가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되는 바이다.
시간에는 3종류가 있다고 본다. 자연적 시간, 주관적 시간, 실존적 시간이 그것이다. 흘러 왔다가 흘러 가는 시간, 우리와는 아무 관계없이, 그리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그저 흐르기만 하는 시간, 이것이 자연적 시간이다.
주관적 시간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가령 하루라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의 하루와 사형수가 사형집행을 앞에 둔 하루는 전연 다를 것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가지 않는 시간이 전자의 경우일 것이고 그야말로 시윗줄 떠난 화살처럼 가버리고 마는 경우가 후자일 것이다.
변화라 해도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다. 망아지가 커서 큰 말이 되고 어린이가 자라 어른이 된다지만 그 변화의 과정은 단기적으로는 판별하기 어렵다.
“선비가 사흘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면 눈을 크게 뜨지 않고는 상대를 알아 볼 수 없다”(士別三日 刮目相對)는 말이 있거니와 이것은 공부를 많이 하면 모습도 달라져 사흘동안 밤새워 글을 읽은 선비는 서로 알아 보지 못하게 변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근면과 각고면려를 장려하는 것일 뿐, 실제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전연 다르게 변화는 것이 있다. 징그러운 송충이가 순간적으로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여기에 한 못이 있고 그 못에 2배씩 번식하는 물 풀이 있다고 하자. 물에 살고 있는 물 풀은 처음 한 개였던 것이 두 개로 불어나고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불어나다가 급기야는 못의 반을 채우고 그 다음 순간 못 전체를 덮어 버릴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순간 순간에 일어난다. 눈에 띠지 않게 서서히 변하는 변화를 change라 하고 어느 순간 전연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것을 metamorphosis라 한다. metamorphosis를 가져오는 시간이 실존적 시간이다.
시간의 단위가 많다는 것은 실존적 시간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 보며 새로운 맹서, 새로운 계획을 다짐하는 기회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점은 실존적 시간이란 것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인들은 졸업을 commencement라 하거니와 이것은 만들어 낸 실존적 시간의 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졸업을 한 과정의 끝으로 보지만 미국인 들은 그것을 딴 과정의 시작으로 본다. 이것은 정녕 만들어 낸 실존적 시간의 한 사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연말이 다가 온다. 연말은 연시를 잉태하며 연시는 새 해의 시작이라는 면에서 새로울 뿐 아니라 진급과 졸업의 시기라는 점에서도 실존적 시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수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김찬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