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 온 해방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부단히 계속되었던 민족해방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미·소의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해방이었다. 이러한 해방의 성격은 나라 만들기의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한반도는 어느새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의 분할 점령되었고, 민족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이념적인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주적 독립 국가를 속히 건설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코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정국이 계속 되었다. 해방공간 속에서 서울의 의미는 시적 공간이자 동시에 산문적 공간으로 읽혀졌다. 박노갑의 단편 ‘역사’(‘개벽’ 1946.1.)는 서울의 이러한 성격을 잘 형상화하고 있는 텍스트다.
주인공 김만오는 일제 강점기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만오는 해방이 되자 새로운 포부를 안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가 상경한 이유 중에 하나는 “보아라 글세, 해방이라 내 세상이라 하여, 하늘로 머리 둔 사람은 제각기 한 몫을 보겠노라, 서울로 서울로 달려드는 판이 아니냔 말이다. 너는 언제든지 이러고, 벽항궁촌에 앉아서 하늘만 치어다볼 작정이냐”라고 자식의 영달을 바라는 아버지의 계속되는 강요였다. “팔월 십오일 이전에 이미 명색 정치 생명 끊어진 자기가, 팔월 십오일 뒤에 갑자기 배당을 요구하는 듯 나서는 것이 꼭 일 벼 때리고 품삯 찾으러 가는 것 이상으로 열적은 일”인줄 알고 있는 만오였지만 결국은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란 기대감이 응축된 곳이 바로 서울이었기 때문이었다.

천구백사십오년 팔월 십오일 시골서는 부쩍, 서울이 그리워진 모양이었다. 오자고만 들으면 삼십 팔도를 넘을 수도 있고, 기차 용마루를 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서울 정거장에 손 툭툭 떨고 나리어, 친구를 만나면 덮어놓고 좋았다. 덮어놓고 떠들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서울에 오느냐, 연유를 물을 사람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처럼 바쁜 이유를 물을 사람이 없었다. (박노갑, ‘역사’ 중에서)

시골에서 올려다 본 서울은 바로 시적인 공간 바로 그것이었다. 서울로 가는 길은 38선도 막을 수 없는 탄탄대로였으며, 서울은 말이 필요 없이 이심전심이 통하는 서정적인 도시였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열기로 뜨겁게 달구어진 도시, 너 나 없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민족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새로운 조국의 수도. 서울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게 만드는 도시였다.
서울에 올라온 만오는 면식이 있는 어느 정당 수령의 집을 찾는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압박의 대상이요 증오의 표적이 되었던 반도인의 집이었던 수령의 집은 어느새 권세의 전당으로 변해 있었다. 해방을 다시 한번 실감을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수령은 만오가 만나기에는 이미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존재였다.

면담을 거절당한 만오는 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거리가 갑자기 혼잡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만오는 “그 몇 십 분 동안 서울 인구 동태에 그렇듯 변화가 생겼다는 것보다는 갈 때와 올 때의 자기 일 개인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일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서정(抒情)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울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여관 방값을 함부로 올려도, 차례 오는 것만 다행으로 아는 것만 보아도 가히 알 일이었다.·····정치를 좋아하여도 줄을 잡지 못하여 줄을 잡으려 다니는 정치 지망자뿐이 아니었다. 파산당한 일본인 세간사리 찌끼 사러 다니는 신사 숙녀뿐이 아니었다. 일터 잃은 노동자가 높은 물가에 방황하는 것뿐이 아니었다. 일확천금, 돈 가진 사람의 꽁무니를 슬며시 노리는 소매치기뿐이 아니었다. 쌀 가지고 온 시골 농부뿐이 아니었다.···티끌과 먼지는 잘 새가 없고 소음과 헌화는 해가 가는 줄을 몰랐다. 소개에 헐린 집터에는 비싼 물건이 쌓였고 대낮에 붉은 얼굴빛은 골목안 값 높은 막걸리 광고판이었다. (‘역사’ 중에서)

군중 속에 휩싸인 채 만오는 서울이란 도시가 가지고 산문성을 꼼꼼하게 살피게 되었다. 서울은 티끌과 먼지와 소음과 헌화의 도시였으며 악덕상인들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시장판임을 직시하게 되었다. 또한 서울은 신문보다는 비라가 정통한 소식이 되는 그런 유언비어의 도시였다. 만오가 서울에서 발견한 것은 민중들과의 삶과 하등 관련이 없는 또 권력 게임이었고 묵은 역사의 되풀이였다. 어느새 만오의 가슴 속에는 기대감 와르르 무너지고 환멸감이 차오르게 된다.

자기 앞에 표 있게 붙은 것은 턱없이 비싼 여관비였다. 온 서울 안에 자기는 끈 떨어진 뜀박이었다. 계통하나 잡지 못한 표류의 날을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그대신 자기와 나날이 멀어가는 것은 민중과의 거리였다.····만오는 하루라도 빨리 제 마을에 돌아가 내 마을 농민들과 더부러 일하고 싶었다. 그것이 오히려 자기로서는 서울의 혼잡을 덜어주는 방도요 또한 의무를 이행하는 특수한 자기의 첩경이라 하였다. (‘역사’ 중에서)

만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만오는 낙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귀향을 하는 것이다. 만오의 눈이 비친 서울은 역사의 의미를 곡해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서울은 권력에 눈이 먼 정객들과 개인의 영달을 꾀하여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정치지망생들, 몰염치한 친일모리배와 악덕상인 등등 불순한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야학을 연 만오는 농민들에게 옛날 어느 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농민의 역사를 찾자고 역설을 하게 된다. 낙관적인 결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역사 속에서 이 장면을 다시 읽게 되면 어떤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서울과 시골의 이분법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은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벌써 심화되고 있었다.
장두식  (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