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한국문화

박 - 생산과 풍요의 상징

▲가을밤이면 달빛을 받은 지붕위의 박이 달빛보다 더 환하다.

▲바가지는 그 크기와 쓰임에 따라 이름이 다
르다.

생사(生死)를 함께 한 아낙네의 벗, 바가지
함 들어올 때·관 나갈 때·동냥 줄 때·물 길 때·굿 할 때 쓰여

옛 아낙네들의 가재도구 중 부엌에서 가장 많이 쓰이던 것이 바가지였다. 지금이야 플라스틱으로 된 알록달록한 바가지들이 많지만 그 시절엔 박으로 만든 바가지가 전부였다. 그래서 바가지는 아낙네와 일생을 함께 했다. 옛 여인들의 생활이 담겨있는 그 박과 바가지를 찾고 싶은 마음에 길을 나섰다.
바가지를 찾아 오른 버스의 창으로 가을이 찾아들고 있었다. 누렇게 익은 벼도 보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그 위를 나는 잠자리들도 보인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위엔 늙은 호박과 덩굴이 얽혀 있다. 커다란 호박 때문에 금방이라도 지붕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이렇게 호박을 얹은 몇 채의 집을 지나 버스에서 내렸다.
마을 저 만치에 보이는 비닐하우스 위에서 노랗고 둥글면서도 길쭉한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조롱박이었다.

서리를 맞아 벌써 잎은 시들어 버리고 박도 썩어가고 있었다. 이 박이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껍질은 바가지가 되어 아낙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을 테고, 박 속은 아이들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고 있었을 텐데…….
버려진 박을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돌리니 배추밭에 물을 뿌리러 나온 노인 내외가 보여 할머니에게 다가가 박과 바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에 바가지 많이 썼지. 박이 어떻게 바가지로 되는지 알우? 이 맘 때쯤이면 박이 잘 익는디, 그걸 따서 반으로 잘라 삶는겨. 속이랑 겉가죽을 긁어서 사나흘 말리면 바가지가 되지.”
박의 껍질은 바가지가 되고, 박 속은 무쳐서 먹을 수도 있단다. 박을 말릴 때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며 주의를 주준다. 그리고는 바가지의 용도에 대한 할머니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하루생활의 시작부터 바가지가 필요해. 아침에 일어나 둥그런 바가지와 항아리를 들고 집을 나서서 언덕 아래 맑은 물이 고인 곳으로 향하지. 오늘 쓸 물을 길러와야 하거든. 그곳에는 아낙들이 모여 한 바가지, 두 바가지 퍼 올리며 아침부터 이른 수다를 나누며 한 독을 채워 집으로 돌아오지. 돌아와서는 밥을 안치고 나물을 무치는데, 나물을 무치는 그릇 또한 바가지지.”
아침을 먹고 남은 밥을 바가지에 퍼 담아놓는다. 그러면 바가지가 습기를 빨아들여 먹기 적당한 상태로 돼, 여름에 시원하게 밥을 먹을 수 있다. 밭에서 거름을 줄 때도 바가지가 쓰였고, 거지가 동냥을 하러 다닐 때도 바가지를 두드리며 다녔다.
“바가지는 무엇을 담아놓고, 퍼내고 하는데 다 쓸 수 있어.”
바가지는 부엌에서 최고의 그릇이었다. 바가지는 깨지면 지붕 위에 올라가 박을 따다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고, 만드는데 돈이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서민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박은 서민들의 삶과 함께 했고, 서민들은 박의 쓰임에 따라 이름을 붙여줬다. 동자박은 부엌일에 쓰이는 바가지, 이남박은 쌀을 일 때 쓰이는 바가지이고 가달박은 큰 바가지를, 종구라기나 쪽박은 작은 바가지를 뜻한다. 바가지는 쓰임에 따라, 크기에 따라 각각에 맞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가지에게는 부엌에서 하는 일 말고 또 하나의 역할이 있다. 바로 귀신을 쫓아주는 역할이다.

큰 엄마는 손을 비비며 중얼거리듯 주문을 외운다. 찬 물수건이 내 이마 위에 얹혀 있고 내 머리맡에는 쌀을 담은 박바가지와 시커먼 부엌칼이 있다. 칼은 박바가지 안의 쌀에 꽂혀있다. …(중략)… 손을 비비며 뭐라고 중얼중얼하던 큰 엄마가 별안간에 일어나 문 밖으로 내달린다. 이어서 마당 한가운데 서서 누군가에게 벽력같이 호통을 치는 큰 엄마. 쌀 한줌이 마당 사방 귀퉁이로 뿌려진다.

공선옥의 『피어라 수선화』의 한 대목을 보면 병이 생겨 굿을 할 때 칼을 꽂아놓고 그 위에 바가지를 씌워 두들겨 깼음을 알 수 있다. 또, 혼례 때 신부의 가마가 신랑 집 문전에 다다랐을 때 바가지를 깨뜨리면서 들어갔고, 장례 때 관이 나갈 때에도 문지방에서 바가지를 깼다.
“혼례 때나 장례 때 박을 깨뜨렸지. 박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잖아. 그 소리에 놀라 귀신이 도망을 간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사람의 생과 사에는 바가지가 있었지. 임신을 하면 시렁 위에 바가지를 얹어두고, 장례 때 관이 나가면 상주가 문지방에서 박을 깨며 나갔어.”

어린아이의 만복의 생성, 병의 치유에 따른 새로운 회복, 혼례로 인한 새로운 부부의 탄생, 사자가 알을 깨고 나감으로써 재생할 수 있다는 생각 등 바가지는 새로운 생산력의 상징이다. 따지고 보면 「흥부전」의 박도 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우리대학 강재철(국어국문학전공) 교수의 『기러기 아범의 두루마기』에 보면 바가지를 ‘생산’과 연결시키고 있다.
처음 박을 따서 반으로 나눈다. 그러면 하나가 둘이 된다. 그리고 박 속은 음식이 되고, 박 껍질은 바가지가 된다. 이렇게 되면 둘이 넷이 되는 것이다. 네 개가 된 바가지로 귀신을 쫓아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게 한다. 이렇게 박을 따는 순간부터 생산은 시작된다.
또, 박은 씨가 많아 다산을 상징했다. 그래서 아낙들이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 주려고 가끔 바가지를 만드는데 가져가질 않아. 요즘 사람들이 그런 미신을 믿나? 가만 보면 요즘 플라스틱 바가지도 잘 안 보여. 싱크대다 세면대다 해서 바가지가 없어도 물을 받을 수 있으니”라며 할머니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아마도 그 옛날 바가지를 사용했던 시절을 떠올렸으리라.
초가 지붕 위에 하얀 박이 올라와 있고, 그 아래에는 잘 익은 호박이 매달려 있고, 초가집 뒤로는 붉은 노을이 지는 풍경. 그 속에서 어머니는 바가지에 음식 재료를 가득 담아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러다가 집 뒤 장독대에 가 조롱박으로 만든 바가지로 간장을 뜨고는 다시 부엌으로 사라진다. 마당에는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지금은 집 근처에서 박은 물론,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어머니는 싱크대에 서서 예쁜 모양과 장식이 된 그릇이나 플라스틱 통에 음식을 담는다. 그 동안 딸아이는 혼자 티브이를 보고 있다. 어머니는 어느 덧 바가지와 멀어져 있다.
생각에 잠겨있던 할머니께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바가지는 여자들만 사용한 게 아니여. 남자들은 부인에게 바가지를 긁혔고, 아이들은 깨진 바가지 조각으로 팽이를 만들어 놀기도 했어.”
가족 모두에게 쓰이던 박과 바가지는 그 모습과 의미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지만 그와 관련된 풍습과 단어들은 여전히 쓰이고 있다. 사람들은 바가지를 긁고, 바가지를 쓴다. ‘바가지 긁다’는 옛날 쥐통이 돌아다닐 때 귀신을 쫓는다 하여 바가지를 문지르던 데서 비롯한 말이다. ‘바가지 썼다’는 개화기 이후 중국에서 십인계라는 놀음이 들어왔는데 물주가 어느 수를 대면 그 수가 적힌 바가지에 돈을 댄 사람은 못 맞춘 사람의 돈을 모두 가지고, 손님이 못 맞출 때에는 물주가 갖게 된다. 이렇게 바가지에 적힌 수를 맞추지 못할 때에는 돈을 잃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을 ‘바가지 썼다’라고 하는데서 유래됐다. 요즘은 대체로 물건을 원래 값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구매했을 경우에 많이 쓴다. 물건을 판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바가지를 씌워 돈을 벌어들여 이익을 본 것이니 이것도 바가지의 생산적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박과 바가지는 우리네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존재였는데 그 존재가 잊혀져가고 있다. 몇 십년의 세월을 함께 했던 아낙들마저 바가지를 찾지 않고, 되려 잊어가고 있다.
이 날 집에 들어가 다락을 뒤졌다. 한 쪽 구석에 먼지가 수북히 쌓인 6개의 조롱박 바가지를 찾아냈다. 그 속에 쌀을 담아보기도 하고, 냉장고에 있는 쑥갓을 넣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물도 떠먹어 보았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가 생겨나거나, 배로 불어날 듯한 느낌이었다.
찾아낸 바가지를 집 쌀독에 가만히 넣어두었다. 어머니가 쌀을 푸며, 옛날 바가지를 쓰던 시절을 잊지 않길 바라면서…….
<황영아 기자>  baby222@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