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물정에 어두워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사는 집은 크고 넓었을 뿐 아니라 앞뒤로 밭이 많았다. 마침 가을바람이 일어나자 마음이 동하여 배추씨를 구해다가 앞뒤 밭에 고루 심었다. 며칠이 지나자 순이 나고 5~6일이 지나자 잎이 퍼져갔다. 신통하고 기이하게 여긴 그가 집안사람들을 시켜 잡풀을 뽑고 너무 촘촘하지 않게 솎아내고 또 거름을 주고 북돋아주게 하였다.
십여 일이 지난 뒤 그가 지팡이를 짚고 앞뒤 밭을 살펴보니, 집 앞의 밭에는 푸른 잎과 흰 줄기가 땅에 가득 무성하고 번화하여 마르거나 시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집 뒤의 밭 한 곳에는 사람의 손이 좀 덜 돌아가서 밭이 거칠고 잡풀과 벌레가 성하여 아주 조잔(凋殘)해졌다. 두루 거닐며 밭을 살펴보던 그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는 듯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지금 이 앞뒤 밭에 난 배추를 보니 사람 기르는 것도 이와 다를 바 없네. 서양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정치와 법률은 이를 것도 없고 거처와 의복과 음식이 다 위생에 마땅하게 하여 날로 인구가 번성하는데, 동양 사람들은 정치와 법률은 물론 거처와 의복, 음식이 모두 위생에 어두워 날로 쇠잔해가니, 서양 사람은 밭에 잡풀도 없고 거름도 하여 북돋워준 저 앞의 밭과 같고, 동양 사람은 밭에 심기는 했으나 김도 매지 않고 거름도 주지 않으며 북돋워주지도 않아 황폐해진 저 뒷밭과 같네그려. 하지만 급히 사람을 시켜 김도 매고 벌레도 잡아주며 거름도 주고 잘 북돋워주면 나머지 배추는 그나마 성하게 자랄 것이오. 허나 만일 그대로 버려둔다면 나중에는 아예 종자도 없어지고 말 터인 즉, 지금 동양의 형세도 급히 정신을 차려 사람들을 거름 주고 북돋워주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양 황인종은 곧 없어지고 서양 백인종만 번성하여 온 세계가 백인종의 천지가 될 것이니 이러한 생각을 우리 동양 사람들이 깊이 하여야 할 것이네.”
매일신문 1898년 9월 29일자에 실린 글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도 서양 사람들을 본받아 정치와 법률은 물론 거처와 의복, 음식에 이르기까지 위생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동양의 황인종은 곧 없어지고 서양 백인종만이 번성하여 온 세상이 백인종 천지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집 앞뒤의 밭에 씨 뿌리고 가꾼 배추를 빗대어 전달하고 있다.

이같은 위기의식과 그에 대한 대응책은 당시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을 바탕으로 하였던 문명개화론자들의 현실인식과 아울러 동양인의 공존공영을 도모하여 서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과도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대동합방론’내지‘황인족 단결론’이라는 논리는 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 도구로 이용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글은 대동합방론 속에 담긴 그같은 함정까지는 주목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문명개화의 필요성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듯, 인간이 사는 사회는 관습과 제도가 오래되면 폐단이 누적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변화와 개혁은 시대적 요청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이며, 그에 대한 열망은 정당한 명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와 개혁이라는 명분의 이면에는 뜻하지 않은 함정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또한 주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다.
윤승준<교양·강의전담> 초빙교수
윤승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