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서울살이 괴로움: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읽기

“돈을 모아야지. 이를 갈아마시듯 돈을 모아야지”
그러나 서울에서 영자가 돈을 모을 수 있는 길은 원래부터 없었다

▲ 영자의 직장이었던 집장촌의 요즘 모습.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

식모살이, 여차장, 결국 창녀로 추락한 영자,
외팔이 창녀 영자는 비극적인 삶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1970년대는 풍요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확인되던 시대였다. 경제개발 정책의 결과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성장의 결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부터 상대적인 빈곤감과 분배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내용에 삼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무리한 산업화와 도시화 정책은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심화시키고 농촌 경제를 붕괴시켰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서울은 이농민들의 급속한 유입으로 인하여 점점 거대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도시계획과 도시기반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의 급속한 인구 증가는 서울의 외양을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질시켜놓았다. 그런데 서울은 외양만 기형적인 것이 아니라 도시의 이면세계도 사회병리 현상의 심화로 인해 비인간적인 관계망으로 구조화되고 있었다.
김지하의 시 <서울길>은 당시 서울로 향하는 이농민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간다/울지마라 간다/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길/몸 팔러 간다//언제야 돌아오리란/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꽃피어 돌아오리란/댕기 풀 안스러운 약속도 없이/간다/울지마라 간다/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사뭇 사뭇 못 잊을 것을/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간다/울지마라 간다/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 길/몸 팔러 간다(<서울길> 전문)

어농민들이 서울로 올라 온 것은 고향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파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그들은 품앗이가 아닌 품팔이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시적 화자가 꿈속에서나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을 노래하고 있듯이 서울로 올라온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향은 이제 옛날의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부평초처럼 근원을 상실한 그들 앞에는 서울에 살기 위해 몸을 팔 일만 남아있었다.
조선작의 악동소설 <영자의 전성시대>(73)는 이농민의 서울살이에서 겪게 되는 최악의 경우를 형상화하고 있다. 고아였던 주인공 ‘나’와 농사꾼의 딸인 ‘영자’는 모두 ‘잘살아 보세’라는 시대 분위기와는 역행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풍요롭게 변모하는 서울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밑바닥에서 허덕거리면 살아가고 있었다. 가난한 농삿집에서 태어나 궁핍을 벗어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온 영자는 이를 갈아마시듯 “돈을 모아야지 이젠 무조건 돈이나 모으는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반복해서 말한다. 하지만 루카치가 소설의 본질을 논의하면서 소설이란 장르에 대해서 ‘길은 시작되었으나 여행이 끝나버린 장르’라고 비유했던 것처럼 서울에서 그녀가 돈을 모을 수 있는 길은 원래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영자는 식모살이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식모살이는 낮과 밤이 모두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아, 식모살이라면 지긋지긋했어. 식모를 뭐 제 집 요강단지로 아는지, 이 놈도 올라타고 저 놈도 올라타고 글쎄 그러려들더라니까요. 하룻밤은 주인놈이 덤벼들면 다음 날은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아들 녀석이 지랄발광이고 내 미쳐죽지 미쳐 죽어…….”라는 영자의 말 속에서 인간적인 도의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읽을 수 있다. 물질위주의 성장 담론은 전통적인 윤리의식을 폐기시키고 쾌락 일변도의 즉물적인 사회 풍조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간관계도 적자생존과 우승열패의 장글의 법칙이 보편화되었다. 무조건 가진 자가 승리하는 그런 배금주의 사회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영자의 식모살이에서 이러한 당대사회의 병리현상이 잘 드러나 있다.
식모살이를 견디다 못해 영자는 버스차장이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전직을 하지만 차장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원버스에서 떨어져, 달려오는 삼륜차에 한쪽 팔을 잃게 되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품팔이를 하러 온 영자가 한쪽 팔을 잃었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결국 영자는 사창가에 흘러들어와 외팔이 창녀로 전락하게 되었다. “다 팔자소관이겠지만 기왕 이렇게 알몸뚱이로 벌어먹어야 할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곧바로 이리로 찾아왔지 미쳤다고 여차장은 뛰어들었느냐”고 탄식하는 영자의 말 속에서 이농민의 서울살이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함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영자에게도 잠시나마 행복한 시기가 있었다. 나는 영자를 위해서 의수를 만들어 주었다. 그 의수 속에는 영자에 대한 나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의수를 끼게 되자 영자는 여느 창녀들처럼 많은 손님들을 받게 된다. 또한 나와의 사랑도 확인하게 되어 살림을 차릴 꿈까지 꾸게 된다. 식모살이, 여차장, 창녀로 추락만 하던 영자의 인생에도 삶의 목표가 생기고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자의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집중 단속 때문에 영자는 사창가를 탈출하여 호황을 누리던 일을 못하게 되고, 그동안 모았던 돈을 모두 나이롱 아줌마에게 떼이게 된 것이다. 만류하는 나를 뿌리치고 영자는 돈을 되돌려 받기 위해 사창가로 돌아가 나이롱 아줌마와의 다툼 끝에 방화를 하고 그 화재 속에서 짧은 생을 마친다. 비극적인 최후였다.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소설의 제목이 더욱더 영자의 비극을 심화시킨다. 그런데 영자의 비극은 영자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영자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의 심화가 바로 영자의 전락과 죽음을 몰고 온 것이다. 개발위주의 정책이 가져다 준 풍요로움이 소외받고 있는 이웃에게 전혀 혜택이 돌아가지 않은 시대가 70년대였기 때문이다.
장두식<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장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