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속 현대인의 소외가 묻어나는 그 곳
아무리 뭉치려해도 뭉쳐지지 않는 모래같은 공간


‘메기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을 뱉어도 물에 잠기는 곳’
원래 서울이란 도시는 미로만들기로 시작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 한 후, 역성혁명 공신들에게 집터를 나눠 줄 때 그 직위에 따라서 집의 평수만 정해주고 위치를 정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공신들은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을 골라 마음대로 터를 정해 집을 지었다. 이들 공신들의 집 때문에 한양의 길은 곧바로 연결될 수 없었고, 미로 같은 골목들이 만들어졌다. 그 후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서울은 해방촌, 달동네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무계획적이고 무차별적으로 확대되면서 더욱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서울이 강남으로 그 영역을 넓히자 강북의 공간과 다른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강남은 서울의 과거사와는 몇 걸음 비켜나 새로운 역사로 발전하게 된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공간이 잠실이다. 1970년대 이전의 잠실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었다. ‘동잠실이 성동 아차산 아래에 있다’라는 <용재총화>의 기록에서 살필 수 있듯이 원래 잠실과 현재의 잠실은 다른 공간이었다. 이 지역은 ‘메기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을 뱉어도 물에 잠기는 곳’이라는 <송파지>의 기록처럼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이 곳의 넓은 들을 농사처가 아닌 뽕나무 숲으로 조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잠실지역은 대규모의 유로 변경사업이 추진되었다. 3년여에 걸친 사업 끝에 잠실은 뚝섬에서 떨어져 나와 송파 쪽으로 육속화되었다. 1974년 구획정리 사업이 끝나자 잠실은 완전히 새로운 땅이자 강남개발의 중심으로 변모하였다.

당시 서울은 포화상태였다. 수출위주의 공업화 정책과 도시화 정책에 의해서 농어민들이 서울로 몰려왔고 이러한 인구 집중에 의해서 서울은 기존의 공간만으로 넘쳐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한강 이남의 개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잠실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도시계획에 맞춰 조성된 잠실 아파트 단지는 무계획적으로 발전해 온 강북과 비교하면 정말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사통팔달로 연결된 넓은 도로와 완벽한 주거기반 시설, 그리고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해 주는 아파트 단지. 근대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아파트 생활은 바로 첨단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는 토대였었다.

“샤우어의 모가지는 사형당한 사형수의 목처럼 꺾이어져 매우 진지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샤우어의 줄기 양 옆에 불쑥 튀어나온 더운 물과 찬물을 공급하는 조종간을 잡았다.····<중략>····그는 비누를 풀어 온몸을 매만진다. 거품이 일어 온몸이 애완용 강아지의 흰 털처럼 무장하였을 때, 그는 그의 성기가 막대기처럼 발기해서 힘차고 꼿꼿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욕망이 끓어오르고, 그는 뜨거운 물속으로 뛰어들면서, 신음을 발하면서, 세찬 물줄기가 가슴을, 성기를 아프도록 때리는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빗물은 싱싱한 정육냄새가 나는 발그스레 상기한 근육을 적신다.” (최인호 <타인의 방> 중에서)

최인호의 타인의 방은 아파트 생활이 가져다 준 모더니즘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따뜻한 샤워로 피로를 풀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달콤한 분말 쥬스로 갈증을 해소하는 생활. 저절로 말초적인 욕망이 일어나는 여유로움. 절대적인 빈곤이 지배하던 전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풍요로운 분위기였다. 이러한 아파트 생활은 당시 서울시민들이 가진 커다란 꿈들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아파트 생활이 결코 긍정적일 수는 없었다.

“잠실의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 서 있다. 둑을 쌓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아 도로를 내기 전에는 범람한 강물이 여름 잠실을 덮쳐누르곤 했었다. 모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잠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시멘트와 철근이다. 시멘트와 철근을 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래만 남아 흩날리게 될 것이다. 모래는 모래끼리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치지 못한다. 슬픈 일이다.” (조세희 <민들레는 없다> 중에서)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쳐지지 않는 모래 같은 공간, 작가 조세희의 눈에는 잠실 아파트 단지가 민들레조차 살 수 없는 부정적인 공간으로 읽혀졌다. 아파트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거대한 사각형 건물에 조그만 사각형 밀실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은 현대인의 소외가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짜여 있었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에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소유한 아파트의 소유물로 전락한다. 아파트의 소유주에서 하나의 가구로 전락하는 그로테스크한 결말 속에서 아파트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소외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아파트 주거문화가 이제는 서울의 보편적인 주거문화가 되었다.
장두식(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메기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을 뱉어도 물에 잠기는 곳’
장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