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동네엔 귀먹은 사람 북쪽동네엔 눈먼사람

오늘 소개하는 우언은 1899년 3월 16일자 ？매일신문？에 실린 글이다. 개화의 필요성과 함께 위로부터의 개화를 주장한 우언으로, 우언이라는 전통적인 양식에 개화라는 새로운 사상을 담은 글이다.
남쪽 동네에는 귀먹은 사람이 하나 살았고 북쪽 동네에는 눈먼 사람이 하나 살았다. 먹고살아갈 길이 없어 막막하게 지내야 했던 이들은 서로를 불쌍히 여겼다. 하루는 이들이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술이 두어 순배 돌아가자 문득 서로를 붙들고 통곡하는 것이었다.
“천지 부모가 우리를 내실 적에 눈과 귀로 듣고 보라 하셨거늘, 우리는 어찌하여 귀가 먹었으며 또 어찌하여 판수가 되었단 말인가? 슬프다! 높기는 임금과 스승만한 이가 없으니, 비록 가르치는 명(命)이 있다 하여도 이를 들을 수가 없구나. 또 사랑하기는 처자(妻子)만한 이가 없으니, 비록 천하에서 제일 고운 모습을 하였어도 이를 볼 수가 없구나. 그림처럼 꾸며낸 오색단청과 커다랗게 울리는 쇠북소리를 모두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야 하니, 이것이 바로 우리 두 사람의 평생의 한(恨)이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화타와 편작 같은 명의(名醫)가 있고, 인삼 백출 같은 명약(名藥)이 있더라도 귀 먹고 눈 먼 사람을 낫게 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들으니 저 구라파 세계의 훌륭한 의원은 비록 배냇병신이라도 한번 시술하면 곧 나아서 개명(開明)치 않은 이가 없다고 한다. 근자에 신기한 약(藥)이 동방에 이르렀는데 다 약물이라 하니, 하나는 보명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보총로라고 하는데, 값이 너무 비싸 하등(下等)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슬프다.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과 이천만 동포 가운데 상등인(上等人)으로서 귀와 눈이 먼 자가 몇 천만이던가? 바라건대 상등인으로부터 먼저 시험하면 하등인이 이에 따르는 것은 잠깐 사이의 일이라. 시무(時務)를 아는 군자(君子)를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우견(愚見)을 드리노라.”

작자는 우리의 고유한 문명과 전통을 귀 먹고 눈 먼 것으로 빗대는 한편, 서구의 신문명은 먼 눈을 밝히는 ‘보명로(補明露)’, 먹은 귀를 뚫어주는 ‘보총로(補聰露)’라는 신약(神藥)에 빗대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정은 ‘문명’과 ‘야만’, ‘선’과 ‘악’의 양분법적 잣대를 가지고 동양을 인식하였던 서양인들의 의식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위아래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하루빨리 그러한 서구 문명을 추종하여 개명(開明)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전통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충격은 당시의 우리 민족에게 그만큼 파천황적인 것이었고 개화는 당대의 급무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장이 나왔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박지원(朴趾源)은 유한준(兪漢雋)에게 보낸 편지글 <답창애(答蒼厓)>에 3살 때 눈이 멀어 40년 동안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게 되었는데, 막상 눈을 뜨게 되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 수 없어 울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눈 뜬 소경에게 보이는 세상은 그가 살아온 지난 40년 동안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낯선 것이었다. 막상 눈을 떠서 좋기는 하였으나, 막상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런 소경이 집을 찾아갈 길은 무엇일까? 박지원은 서화담을 끌어들여 소경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금 눈을 감고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한다.
？매일신보？에 실린 ‘벙어리와 장님’이란 우언은 박지원의 <답창애>와 같이 놓고 읽어보면, 새로운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과연 이 시기 우리 민족이 택했어야 할 현명한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윤승준<교양·강의전담> 초빙교수
윤승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