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풍월(風月)’도 ‘단장(丹粧)’하던 곳
일년에 두번 추석과 설을 맞아 동네이발소는 미어터진다

푹신한 이발의자 앞에는 제법 잘 닦아놓은 대형 거울이 걸려있고, 거울 밑으로는 바리캉이며 면도기 같은 이발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다.

어른 이발료가 10원이었고 아이들은 5원씩 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5원쯤 했으니 이발료가 버스요금보다 헐했던 시절이다.

먹고살기 바빠 허덕이던 세월도 이곳에서만은 한숨 쉬어간다. 온갖 들은 풍월(風月)이 모여들고, 동네의 대소사가 전해지고, 홀아비도 총각도 사내아이들도 모두 이곳에서 세파를 한꺼풀씩 벗고 나온다.
추석과 설날 전에 동네 이발소 앞은 더욱 붐빈다. 동네 어른 순으로 차례차례 의자에 앉아 이발사의 바리캉(프랑스 바리캉 제조회사에서 유래된 이름)과 가위에 몸을 맡긴 어른들은 한숨 잠을 청한다.
아이들은 난로 옆 대기의자에 앉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차례를 기다린다. 이발이 끝나면 아버지를 따라온 열살 남짓 사내아이들의 머리는 모두 상고머리가 된다. 제법 멋 부릴 줄 아는 사내들 또는 점잖아 보이는 중년의 신사들도 이발의자에 앉으면 ‘신성일 머리’,‘송해 머리’로 해달라며 말이 많아진다.
하얀 페인트로 ‘이발소’라고 적힌 간판아래 낡은 이발소 표시등이 어지럽게 빙빙 돌아간다. 이가 맞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연탄난로 위에는 면도용 비누거품이 끓고 난로 연통을 고정시킨 철사줄에는 빨강, 노랑, 파랑의 수건들이 걸려있다. 푹신한 이발의자 앞에는 제법 잘 닦아놓은 대형 거울이 걸려있고, 거울 밑으로는 바리캉이며 면도기 같은 이발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다.
서울시내 한복판, 예전의 이발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포구 공덕동의 성우 이용원에 들어섰다. 이발사는 손님의 머리를 다듬느라 정신없다.

이발사: 요즘 정치인들은 다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손 님: 그러게나 말이야. 뭐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만 손해보고 사는 거지 뭐.
이발사: 사람을 뽑을 때 잘 뽑아야 해요. 나는 무조건 귀가 큰 사람만 뽑는 걸요.
손 님: 왜? 우리같이 어렵게 사는 사람들 얘기 많이 들으라고?
이발사: 아뇨. 귀가 큰 사람들이 대체로 머리가 좋아요. 제가 관상학 좀 공부했거든요.
관상학을 공부하다보니 이젠 대충 관상도 볼 수 있지요.
손 님: 그럼 한번 내 관상 좀 봐줘 봐.
이발사: 할아버님은 인상이 좋으셔서 항상 복이 따르네요.
손 님: 허허. 머리 깎으면서 이래저래 좋은 얘기도 듣고 재밌네 그려. 원래 이렇게 아는게 많아?
이발사: 아뇨. 할아버님이 복 받으신 거지. 나 아무한테나 이런 얘기 안 해요.
◀40년 된 마포구 공덕동 성우이용원.

정치인 이야기에서 갑자기 관상학으로 화제가 바뀌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이곳의 풍경이다. 이렇듯 예전의 이발관은 동네의 사랑방이었다.
60~70년대 이발소에 대한 낡은 기억을 몇 개 끄집어내어 본다.
예전엔 면도날을 갖고 있던 집이 몇 집 되지 않아 이발소만이 유일한 단장의 장소였다. 이발사는 손님이 오면 한껏 뒤로 젖힌 이발의자에 눕히고 턱 주위에 하얀 비누거품 발라 10년은 더 대고 갈았을, 찢어진 가죽혁대에 면도칼을 쓱쓱 문질러 손님의 수염을 다듬는다. 면도가 끝나면 뜨거운 물수건으로 거품을 닦아내고 초록병 스킨으로 마무리하면 네 평 남짓한 이발소는 온통 진한 스킨냄새로 가득 찬다.
요즘은 이발관에서 여자손님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전엔 결혼을 앞둔 아가씨들을 이발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맛사지에서 얼굴의 솜털정리까지 요즘의 피부관리실이 부럽지 않았다. 또 이발소 한귀퉁이에서는 젖먹이 아이를 데려온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순서를 기다린다. 어디 그뿐 만이랴. 여중생들의 정숙한 단발머리는 모두 이발사의 솜씨였다.
잘 안드는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면 머리 뽑힌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이고, 계집 아이 건 사내 아이 건 서캐가 하얗게 앉은 아이들을 이발소로 끌고 오면 싫다고 도망 다니는 통에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연탄 난로 위 양은솥에는 항상 뜨거운 물이 끓는다. 뜨거운 물을 욕조통에 미리 받아 놓은 찬물과 함께 머리감는 조리(물뿌리개)에 대충 담아 손님의 머리를 적신다. 여느 미장원에서처럼 “뜨겁지는 않느냐. 불편한 것은 없느냐”는 세심함도 없다. 어쩌다 눈에 비누가 들어가도 손님은 알아서 비눗물을 닦아낸다.
성우 이용원의 이남열 이발사는 우리 기억 속 추억의 이발관이 점차 사라지는 요즘 서울 한복판에서 꿋꿋이 옛 이발관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창 손님의 얼굴을 단장중인 이발사

그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하던 1964년에는 어른 이발료가 10원이었고 아이들은 5원씩 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5원쯤 했으니 이발료가 버스요금보다 헐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이발료가 1만원까지 올랐다. 여느 도회지의 미장원 못지 않은 가격이지만 여기에는 이발사의 정성과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값이 포함돼 있다.
이 일이 힘들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이제는 이 일이 천직이라 생각한다”며 그냥 웃는다. 그러다가 곧 나도 사람인데 어찌 힘들지 않겠느냐며 자신의 경험담을 말해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임종을 앞둔 양반의 머리를 정돈하고자 출장이발을 가는데 그게 보통 힘든일이 아니야.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면 그보다 더 섬뜩할 수가 없어. 죽어가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란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래도 이 일이 천직이라며 그가 다시 한번 빙그레 웃는다.
사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그는 불과 2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이발 보조사를 3명이나 두고 있었다.
“그 때에는 손님 3명만 이발하면 직원 1명분의 월급을 벌 수 있었는데 요즘은 인건비가 너무 올라 이 형편에 보조사를 두는 것은 사치”라고 했다.
한 때는 모든 젊은이들이 하얀 가운을 걸치고 가위질을 하던 이발사를 동경했다. 또 한 때는 이발소에 가는 남편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내들이 있었다.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퇴폐이발소가 생겨나고 아내의 눈치를 살피던 남편들은 이발소 대신 미장원으로 발길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열살 남짓 사내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 대신 미장원으로 향한다. 아니면 아예 엄마 손을 붙들고 어린이 전용 미용실을 찾는다.
그래도 가끔 옛것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온갖 옛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책 한 권과도 같은 이발관. 그러나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옛것은 하얀 가운을 걸치고 마음씨 좋은 동네 이발소 아저씨의 구수한 추억담일 것이다.
◀조리개에 물을 담아 머리를 감긴다

◀이용 요금표

◀면도 전용 붓과 비누거품 그릇.
<홍혜승 기자>  lovelovehong@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