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서울

80년대 종로에 선 ‘네거리의 순이’ : 강석경의 <숲 속의 방> 읽기

치외법권 지대였던 종로에서의 민주화 운동
청춘들이 성인으로 나아가는 통과의례의 공간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 해가 질 때 / 눈 앞이 아득해 오는 밤 / 눈 앞이 아득해 오는 밤 / 해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 서성이다 서성이다 / 떠나는 나의 그림자 /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 오늘도 비는 내리고 / 거리에 우산들처럼 / 말없이 돌아가지만 / 아 사람들이여 /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박혜정 작시, 김상헌 작곡, 안치환 노래)

꿈꾸고 있는 세계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괴리감이 나를 부정했던 경험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발 빠르게 현실의 논리를 수용하고, 깊숙한 생존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 꿈도, 생존도 아닌 곳에 자신을 위치하며, 부유하는 자가 있다. 모순된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꿈의 세계로 다가가고자 했지만, 꿈이 내포하고 있는 자가당착적인 논리에 절망한다.
인용한 시는 1986년 자살한 서울대 국문학과생의 유작시이다. 그녀의 짧았던 삶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가 1980년대 대학가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뚜렷한 표어를 걸고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죽음이 1980년대의 민주화 시위와 대학생으로서의 실존 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죽음 또한 불우한 시대 상황 속에서 이뤄진 비극적 행위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1980~90년대 ‘열사’의 이름으로 불려졌던 많은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죽음에 가려져 그들의 죽음은 사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들의 죽음이 공공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앞의 희생자들보다 역사적 의미가 낮게 평가될 수 있다. 이상을 향해 몸을 던졌던 이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한 장을 채우겠지만, 다른 한 편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이상에 몸을 던지지 못하고 절망적으로 생을 포기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위무(慰撫) 이상은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현존을 가능하게 했던 삶의 근원을 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만을 말하는 것은 기만의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강석경의 「숲속의 방」(민음사, 1986)의 ‘소양’은 이상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면을 강변할 수 없는 질곡의 상황에 놓여 있다. 고교 시절의 절친한 친구였던 ‘명주’처럼 투철한 세계의 변혁을 외치며 운동권 학생이 될 수도 있지만, 진정성의 확보는 대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의 정치경제학적 기반을 부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보수적인 ‘소양’의 아버지는 1980년대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 중 하나인 저임금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경영(?)하는 소자본가였고, ‘소양’의 학비는 이러한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양’이 대학생의 학적을 유지하면서 한국사회의 소외 계급에 대한 평등을 외치는 것은 자기모순의 논리에 빠지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자기모순을 온전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은 역사의 진화라는 거창한 명제에 편승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도 아니고, 부정적 현실에 눈감는 것도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중압감에 눌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방황하는 것만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소양’과 같이 삶의 언저리를 겉돌며 헤매는 청춘들의 휴식처는 어디인가? 교실과 광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1980년대 대학가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노래하고 현실에 대한 구역질을 토해내는 선술집들이 많았다. 그런데 특정 대학가 앞의 선술집들이 해당 대학 구성원들의 출입이 잦았다면, 종로2가는 서울의 청춘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YMCA 뒷골목의 루삥집들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이른 청춘들은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고, 이로 인해 부딪치고, 상처받으면서 성인을 향해갔다. 1980년대 종로2가는 청춘들이 성인으로 나아가는 통과의례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성인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옷차림을 하고, 길에 서서 핫도그를 먹으며 거리 전체를 장악했다. 80년대의 익숙한 거리풍경처럼 큰 골목 어귀에는 전경차가 진을 치고 두터운 진압 복장을 입은 전투경찰들이 금방이라도 도로 가운데로 뛰어들 것 같은 젊은이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지만, 종로 거리를 지나는 젊은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든 정류장에서 가방을 메고 다니는 젊은 사람들만 보아도 불심검문을 하는 둥 상시적인 감시가 이뤄졌지만 종로는 성인이 되지 않아 행복한(?) 이들이 모여들어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그러나 청춘의 치외법권 지대는 욕망의 해소에만 한정되어 있다. 이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걷던 인도에서 벗어나 차도로 뛰어든다면 순식간에 ‘안드로메다 군단(전투경찰)’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 1980년대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의 실존적 지반과 단절하여 새로운 장에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인식론적 전환과 이를 실천적으로 행한다는 것이야말로 결코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80년대 종로에 서있는 네거리의 순이 ‘소양’은 임화의 ‘순이’처럼 역사적 당위성만으로 무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 젊은이들이 차도로 뛰어드는 순간 전투경찰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 80년대의 현실이었다.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