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오름


오름으로 본 생로병사
마지막 말태우기도 떠난 지금
그래도 오름은 외롭지 않다
오름에서 태어나고
오름에서 나는
풀을 먹으며
오름에 뼈를 묻는다

자기중심의 편견을 버리고
오름에서 눈, 비바람 속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가쁜 숨을 견디어 보아라


본사에서는 지난달 4일부터 3일간 제주도에 ‘오름’을 소재로 현장취재를 다녀왔다. 취재는 주로 북제주군 구좌읍에 위치한 용눈이오름을 중심으로 다랑쉬오름, 아부오름, 사진작가 故김영갑 씨의 ‘두모악’ 갤러리 등에서 이루어졌다. 취재팀은 자연형태로서의 오름뿐만 아니라 방목을 하며 오름을 삶의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이들의 삶에 취재의 중점을 두었다. 한편, 제주도의 마지막 남은 말태우기(목동)인 고태호(76) 옹과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고태호 옹의 건강 악화로 성사되지 못했다. <편집자주>
푸르고 부드러운, 광활하고 잔잔한, 우직하고 소소한, 볼록하고 오목한, 솟은 듯 미끄러지는, 황톳빛 벌거숭이.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게, 숨 한 번 크게 들이킬 수 없는 섬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눈으로 싸여 있던 오름은 그렇게 바람 소리 뿐. 온순하지만 고분고분 하지는 않았다. 저기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은 정상을 만만히 보고 오르면 금세 지쳐 마치 닿을 듯 닿지 않는 연인과의 손잡기 같다. 하지만 ‘그래. 조금씩 가자. 천천히 더듬자.’하면 자신의 아름다움 속으로 한껏 끌어안는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거저 얻는 것을 바라지 않고, 이웃에게 지레 욕된 마음을 품지 않는 그 섬사람들과 닮았다. 욕심을 지고 오르면 바람에 밀리는 고된 산행이요. 욕심을 버리고 오르면 바람에 감겨 벌써 정상에 다다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 나무’한 그루가 있었다. 실은, 나무는 이 세상에 뿌리를 거둔지 이미 반년이 지났다. 하지만 나무가 살아 있을 때 그 어떤 나무보다 열정적으로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 나무는 열매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이를 위해서라면 뜨거운 햇빛이나 추위, 정신없이 불어대는 태풍의 길목에서도 심지어 외로움까지도 기꺼이 숙명으로 여겼다. 그렇게 살아온 생의 끝에서 그는 너무나 앙상하고 초라해져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단 하나의 열매가 열렸는데 그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별것 아니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열매에게 무심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이 주신 선물로 여기며 이제는 자신의 생의 유일한 증거요, 전부가 되어버린 열매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두 눈으로 보았고, 두 귀로 들었고, 두 손으로 만져보고, 두 개의 콧구멍으로 맡아보고, 온몸으로 느껴보았기에 확신했던 것들이 진짜배기가 아니라 허드레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20년 동안 오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두 개, 세 개 욕심을 부렸다. 중산간 오름 모두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는 조급함에 허둥대었다. 침대에 누워 지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같은 과오를 범했을 것이다.”
지난해 5월의 마지막 날, 사진작가 김영갑 씨는 전 생애로 키워낸 열매 하나를 토해내고 이승을 떠났다. 나이로는 지천명을 이루기에 조금 부족했지만 온 몸이 굳어지는 병으로 그의 말대로 라면 생을 앞 당겨 살았나 보다. 세상과 등져가며 야망 찬 예술가가 손에 쥔 것은 이어도의 ‘하늘’과 ‘오름’. 그리고 깨달은 것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것, 자연의 질서, 생명의 순환, 잠자코 커다란 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뿐이었다. 자신의 작음을 알아야 하늘의 광대함을 알 수 있듯 김영갑 씨는 그렇게 하늘의 뜻을 알았다.

무리한 것 같지만, 김영갑 씨가 찾아 헤매던, “평화로운 제주에서 태어나 씨를 뿌리고 거두며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 졌다. 이어도가, 관광의 섬 제주도로 잊혀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던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그 길에 동참했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나 없는 것이 오름이다. 제주 안에서는 흔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는 이름 지어진 오름만 자그마치 3백60여개가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섬사람들조차 오름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않았다. 오름엔 사람이 드물어 간간히 말이나 소에게 풀을 뜯게 하는 목동이나 밭을 일구는 바쁜 손짓뿐이었다. 척박한 땅을 파먹고 살며 여의치 않지만 평화로웠다는 이들이 만드는 풍경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지난 세월의 흔적 속에서 오름과 토박이들의 삶을 볼 수 있었다.
방향을 가늠 할 수 없이 스산스럽게 불어대는 바람에 실려 까만 땅 위에 흰 눈이 흩뿌려진다. 세상엔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흑과 백 뿐이다. 본래 까만 세상이었으니까 흰 눈이 세상을 더럽히는 것일까, 아니면 까맣게 더럽던 세상을 흰 눈이 깨끗하게 가려주는 것 일까. 이 섬과 섬사람 그리고 오름을 이해하려면 먼저 전인(前人)의 때를 벗어야 한다. 흰 것은 깨끗하고 까만 것은 더럽다는 생각, 떨어져 버려지는 것들이 더럽다는 생각, 산은 정복하는 것이라는 생각들이다. 이 섬의 경우와 같이 때로는 검은 땅이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고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버려진 눈은 금세 녹아 검은 순수의 동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또 가장 높고 험준한 산을 정복한 사람을 최고의 산악인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오름의 진가를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등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찍어가며 산과 싸움을 한다. 그러나 오름은 한 걸음 한 걸음 보듬어가며 산과 사귀어야 한다. 웅장하고 거대한 산을 자그마한 깃대 하나로 소유 할 수 있다는 야심에 찬 사람들은 그 산에서 죽는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망자가 영원한 추위에 떨어야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서 산을 내려오지 못했기에 정복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도전이라는 야심이 자신들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오름과 사귀던 사람들은 오름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원한다. 결코 높음이나 추위 따위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귐엔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름의 몸에 자신의 몸을 누이고 또 하나의 작은 오름을 만들며 영원한 흔적을 만드는 것이 삶의 마지막 자리라고 여긴다.

하얀 눈은 무덤가를 둘러싸고 있는 까만 돌담 위에도 앉는다. 오름의 뿌리 주위에 무덤이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이 귀한 섬에서 사람들은 물이 나는 곳에 마을을 이루었다. 해변에서는 용천대가 솟고 오름에서는 봉천대가 솟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물을 좇아 오름 주위에 모여 들었고 말과 소와 함께 오름에서 나는 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삶의 터전이었던 그 곳에 뼈를 묻었다. 신이 사람을 흙으로 빚은 것처럼 이 곳 사람들은 오름에서 와서 오름으로 돌아가는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믿는다. 그래서 오름 위에 자리 잡은 무덤은 마치 오름의 일부였던 것처럼 봄엔 푸른 싹을 돋우며 가을엔 누렇게 몸을 물들여 경관을 헤치지 않는다.
발이 묶였다. 하룻밤만 묵고 아침 일찍 나오는 일정이었는데 파랑주의보에 우리 일행은 꼬박 이틀을 우도에서 보내야 했다. 그래도 덕분에 솜씨 좋은 식당에서 신선한 회와 생선 조림, 우도에서만 맛 볼 수 있다는 구수한 해물탕 등 그 집 대표 식단은 전부 맛 볼 수 있었다. 첫 날 저녁, 바람이 많이 불 것 같다고 걱정하는 우리 일행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걱정 마시오. 내일이면 잔잔해 질 테니”. 다음날 걱정은 한층 더 했다. 이날은 안주인이 이렇게 말했다.“그러다 병나 것소. 맘 편히 먹고 있어요. 곧 잔잔해 지겠지요.”다음날 오전, 겨우 섬을 나오고 나서 얼마 후 다시 그 섬 바다엔 파랑 주의보가 내렸다. 그 바람이 식당 주인집 말처럼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섬에서 가까스로 나오고서야 알게 됐다.

조급함이 없는 사람들. 이들의 마음속엔 걸음을 재촉해야하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 토박이들과 도시에서 관광업으로 들어온 사람은 말 몇 마디만 나눠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연유는 말투 때문이 아니다. 제주도 토박이들에게는 특유의 평화로움과 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고 떠날 사람들이지만 좀 더 주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태도는 제주도 토박이들의 공통점이었다. 이런 평화로움은 오름의 대표적인 아름다움이다. 울창한 숲도 없고 고작해야 작은 꽃과 갈대, 잔디뿐이지만 그 조용하고 바람 부는 언덕은 언제나 평화로움으로 아름답다.
사진작가 김영갑 씨는 오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진짜 중산간을, 오름에 깃든 희망과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려면 우선 그 들판에 홀로서서 눈을 감아라.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자기중심의 편견을 버리고 오름에서 눈, 비바람 속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가쁜 숨을 견디어 보아라. 태풍 오는 길목에서 나목처럼 억새처럼 흔들릴 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서 들꽃의 향기에 취할 때, 나무, 풀, 곤충, 돌 그 모든 자연과 한 호흡으로 숨 쉴 때, 비로소 중산간 들녘 오름은 그대의 친구가 되고 그대의 스승이 된다.”
하늘이 눈앞에서 내려오는 곳, 햇살을 오목한 주둥이로 한가득 받아 내는 곳, 바람이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는 곳, 오름은 대자연의 정수리 같다.
<조영리 기자>
diadiadl18@dankook.ac.kr

▲ 용눈이 오름에서 본 다랑쉬오름.

▲ 오름이 시작되는 부분에 자리잡은 무덤들.

▲ 하얀 눈이 쌓인 용눈이오름.

고 김영갑 사진작가의 용눈이오름 전경 사진.
조영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