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의 중편소설 ‘태평천하’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윤직원 노인의 서울살이는 너무나 행복하다. 부재지주인 그가 서울로 이주하게 된 내력은 시골에서는 여러 가지 공과금이나 기부금을 내야하고, 빈곤한 일가붙이들에게 뜯기는 성가신 일과 함께 양복 입은 나그네들에게 돈을 강탈당하는 치안부재의 위험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나그네들이란 독립자금을 모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텍스트 속에서 암시되고 있지만 윤직원에게 시골은 험한 꼴만 당하는 못살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서울에 올라 온 윤직원은 인력거 삯을 깎는 등 온갖 구두쇠 짓과 수형(어음) 장사를 해서 더욱 재산을 불리고, 동기(童妓) 춘심이를 데리고 부민관에서 열리는 명창대회를 구경하러 가거나 본정통 진고개(명동)로 반지 선물을 사러 다니는 느긋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대복이가 윤직원 영감의 머리맡 연상에 놓인 세트의 스위치를 누르는 대로 JODK의 풍류가 마침 기다렸다는 듯 좌악 흘러 나옵니다. “띠양 찌-찌 즈응 증지 따앙 증응 다앙·····”잔 영산입니다. 청승스런 단소의 둥근 청과 의뭉한 거문고의 큰 소리가 서로 얽혔다 풀렸다 하는 사이를 가냘퍼도 양금이 야무지게 먹이고 나갑니다.···이윽고 초장이, 끝을 흥있이 몰아치는 바람에, 담뱃대를 물고 모로 따악 드러누워서 듣고 있던 윤직원 영감은, “좋다아!” 하면서 큼직한 엉덩판을 한번 칩니다.(‘태평천하’ 중에서)

위의 인용에서 살필 수 있듯이 윤직원에게 서울 생활은 정말 태평천하 중의 태평천하라고 할 수 있다. 윤직원을 통하여 토지 수익을 상공업·고리대금업 등에 투자하여 점차 상공업자본가로 전환하는 식민지 부재지주의 전형적인 변모과정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윤직원은 부정적인 인물로 풍자의 대상이며 그의 서울생활 또한 풍자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대 후반기 서울은 윤직원 같은 인물에게는 축재의 공간이자 놀이의 공간일지 몰라도 서울시민들에게는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는 고통의 공간이었다.
작가 채만식은 다음과 같은 수필에서 당시 서울의 어두운 삽화를 그리고 있다.

····한 그저 열 사오 세 고 또래 고 또래의 소녀가 네 명이 따랐다. 얼굴엔 넷이 죄다가 깊은 병색이 질렸고 쓰러질 듯 원기들이 없었다. 제마다 가피(假皮) 트렁크는 하나씩 빠듯이 들고, 곳은 바로 유명한 공장지구 남경성·····남경성에 있는 어떤 방직공장이나 방적공장의 여공 아이들일시 분명했다. 그리고 정녕코 병이 나서 쟤네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일시 또한 분명했다.···농촌에서 출생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은 도시에서 출생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보다 폐의 결핵에 대한 저항력이 대단히 약한 법이다. 이 소녀도 그러므로 저의 고향인 농촌에서 끝내 살았다면 혹은 그러한 불행한 병의 감염을 받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귀향 도중’)

남경성(南京城)은 한강대교 건너편 노량진, 영등포를 말한다. 이 시기가 되면 서울은 도성을 벗어나 한강 이남까지 영역이 확장되게 된다. 서울의 채소공급지였던 영등포는 1919년 경성방적공장이 세워졌고, 30년대 초가 되면 피혁공장, 맥주공장, 기와공장, 방적공장 기계공장 등이 세워져 근대적 공단지대로 발전하였다. 경성방적을 뺀 나머지 공장들의 소유주들은 물론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노동자들은 조선인들이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 기간 동안에 대다수 조선 농민들은 몰락하여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올라와 도시빈민이 되거나 유이민으로 전락하였다. 도시로 올라온 이농민들은 산업예비군을 형성하여 공장에서의 노동조건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영등포 지역은 가혹한 식민지 수탈이 자행되는 현장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사회 사정 속에서 병든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들의 모습과 강경애의 장편소설 ‘인간문제’에서 폐결핵으로 비참하게 죽는 여주인공 ‘선비’의 모습이 중첩된다. 고향에서 살았으면 건강했을 소녀들이 서울로 올라와 치명적인 병에 걸려 귀향을 하고 있는 상황. 식민지 여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 소녀들이 서울 생활에서 받은 보수는 일급을 저축한 10원과 두 벌의 인조견 의복 그리고 한 개의 가피 트렁크와 얼마간의 도회적인 허영심뿐이었다고 간파한 작가의 마음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소녀들은 중간에 셋은 떨어지고 TB의 소녀 하나만 아직껏 동행이었다. 차창 밖이 밝자 연해 내다보면서 김제까지 몇 정거장이냐고 묻고 또 묻고 하기를 마지않는다. 퍽도 즐거운 모양이나 그 즐거워하는 양이 미소로와질 수가 없었다.····병이 나으면! TB가 나으면 시집을 가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몇 번이고 뇌다가 필경 나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차고 말았다.(‘귀향 도중’)

1930년대 후반기 서울의 외양은 남경성 지역이 근대적인 공장지대로 발전하는 등 근대적인 대도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울의 겉모습과는 달리 서울시민들의 삶은 점점 더 어두운 그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도시영세민들과도 구별되는 극빈상태의 토막민(土幕民)들이 후암동·신당동·아현동·용두동·신설동 등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총독부 보고서를 보더라도 당시 서민들에게 서울살이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장두식  (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