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은 라디오는커녕 신문도 이삼일이나 늦은 이곳에서라 이 역사적 ‘팔월 십오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지나버리었고, 그 이튿날 아침에야 서울 친구의 다만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로 비로소 재 육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여행증명도 얻을 겸 눈치를 보러 주재소에 갔으되, 순사도 부장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가네무라 순사에게 넌지시, 김직원이 어찌 되어 나오지 못하느냐 물었더니, “그런 고집불통 영감은 한참 그런데서 땀 좀 내야죠 !”한다.
해방이란 무엇인가? 이태준의 ‘해방전후’(「문학」, 1947. 7)에 나오는 한 구절은 우리에게 1945년 해방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제 말기 친일에 대한 강요를 피하기 위하여 강원도 철원의 시골로 피난한 ‘현’은 그곳에서 히로히토가 항복 선언을 한지 3일이 지나서야 풍문으로 해방이 되었음을 전해 듣는다. 일제의 수구는 항복했지만, 아직 치안은 일제가 맡고 있는 상황에서 오랜 세월 식민지의 압제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의 표정은 “어떤 세상이라고 똑똑히 모르는 걸 입을 놀리겠소?”라는 촌부의 말처럼 희망의 얼굴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정보로부터 거리가 있던 시골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건국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온 ‘현’이 본 해방된 서울의 풍경은 여전히 독오른 일본 군대가 거리를 경비하고 있다. 여전히 일제의 조선총독부와 일본군대가 조선민족을 명령하고 있는 상황은 해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현’은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단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해방을 실감한다. 해방에 대한 지식인들의 움직임은 ‘현’의 말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즉 일상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부터 이뤄지고 있는 해방은 실체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철원에서 올라 온 ‘현’이 본 서울의 모습은 여전히 식민지 경성의 모습일 뿐이다.
종로 화신상회(현재 종로 2가 삼성타워 자리) 앞에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여러 정당들과 단체들의 삐라가 뿌려지고 이를 청소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이뤄짐에도 대부분의 조선 민중들은 희망 속에서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이들의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열망보다는 오랜 세월동안 식민통치를 경험하면서 생긴 타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이들의 눈치 보기에서 비롯한 결과였다.

그럼 일상에서 느껴지는 해방된 공간의 서울은 어떠했을까? 해방이 되자마자 서울은 많은 인구들로 넘친다. 일제 말기 서울에 오기 위해서는 여행증명을 받아야만 왕래가 가능했지만, 해방이 이런 제약이 없어지면서 인구가 넘치는 것에서부터 일상의 변화는 실감되었던 것이다. 해방의 감격은 정치지망생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세간사리 찌기를 사러 다니는 장사꾼, 구직을 위해 방황하는 노동자들, 쌀을 팔러 온 농부들, 그리고 이렇게 서울에 몰려든 인구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 여관 방값을 터무니없이 올리는 여관 주인들과 부족한 생필품을 팔아 폭리를 취하는 악덕 장사꾼들이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다. “티끌과 먼지는 잘 새가 없고 소음과 헌화는 해가 가는 줄 모르는 곳(박노갑, ‘역사’(「개벽」 복간호, 1946. 1)”이 해방된 서울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채만식은 ‘미스터 방’(「대조」, 1946. 6)에서 신기리 장수 ‘三복이’의 의식을 통해 위와 같은 해방정국의 허위성을 고발한다. 십전이나 십오전에 박아주던 징(구두의 뒤축이 닳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박는 보조물)을 올려 받아도 순사의 감시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기뻐하며 독립도 할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신만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징뿐만 아니라 구두 수선 재료를 공급하는 도가(都家)들이 재료값을 제 맘대로 올리면서 독립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이런 엠-병헐! 그눔에 경제겐 다 어디루 가 뒈졌어. 독립은 우-라진다구 독립을 헌담”하고 게걸스럽게 내뱉는 것처럼 일상에서의 해방은 희망으로만 비춰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제를 대신하여 그 해 9월에 한반도에 미국군이 주둔하면서 해방공간의 서울은 ‘三복이’에서 통역 ‘미스터 方’으로 변신하는 이들의 인생역전처럼 모사꾼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면서 짧은 영어나마 하는 이들은 모두 미군에 빌붙어 승승장구한다. 미군정 치하에서 치부와 출세를 위해서는 영어라는 매개물을 통해 미군 지배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거나, 미군의 양첩(洋妾)이 되는 길이다. ‘미스터 방’의 ‘삼복이’가 전자라면, 염상섭의 ‘안라’(「양과자갑」, 「해방문학선집」, 1949. 9)는 후자이다. ‘삼복이’가 보다 크게 이권에 개입하여 축재를 하고 있었다면, ‘안라’는 미군의 첩이 되어 적산가옥(일본인 소유의 건물이었으나 해방이 되면서 일본이의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은 국가 소유의 가옥)을 불하받는다. 미군이 써 준 한 장의 종이가 집문서 역할을 하는 혼란한 상황에서 미군에 빌붙은 인생들의 주 활동 공간은 해방된 서울이었던 것이다.
해방 공간의 남대문 시장에는 일제 말기 공출과 배급 제한에 묶여 나오지 않았던 식료품을 비롯한 물화들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재화의 몫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일제라는 외세가 물러간 공간에서 또 다른 외세에 의하여 장악된 해방공간의 서울은 외세에 기생하는 이들만이 혜택을 보는 곳이었다. 즉 해방 공간의 서울은 모든 사람이 희망을 노래하는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재관  <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