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이야기 -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중심으로

⑪ 역사는 바뀌어도 진실은 전한다


얼마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독도우표 발행 중단 요구가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자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그런데 이 문제들은 앞으로도 계속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다. 중국이나 일본의 준비되고 계산된 ‘동북공정’과 ‘독도영유권’ 주장에는 정치적인 전략이나 영토문제 등이 깔려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들 나라의 역사인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 우리는 뒷북만 치고 있는 실정이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결코 흥분하거나 서둘러서는 안된다. 차분히 차근차근 준비를 하여 중국과 일본의 주장이 억지임을 조목조목 합리적으로 밝힐 수 있는 대응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올바른 역사관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의 나라의 역사이든 자기 나라의 역사이든 간에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공자(孔子)가 지은 「춘추(春秋)」를 들 수 있다. 「춘추」의 역사의식은 유교적 역사의식의 전형으로 간주되어 왔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는 것, 이것이 「춘추」의 정신이다. 이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한다. 춘추필법은 거창하지 않았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고, 선한 것을 선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고, 현명한 사람을 현명하다 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어리석었다고 했을 뿐이다. 이 평가가 후대에 전해져서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래서 역대 왕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역사였다. 자신의 행위가 남김없이 기록되어 후대에 영원히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초연할 수 있는 왕은 없었다.
춘추필법의 대의(大義)가 정명실(正名實) ·변시비(辨是非)·우포폄(寓褒貶)으로 이어져 왔음은 동양에서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사관들도 사초(史草)를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작성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관들은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史筆)을 굽힐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젊은 시절 사관을 역임했던 유희춘 역시 춘추대의(春秋大義)정신을 본받아 가식없는 역사기술과 철저하고도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특히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미암일기」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2편만 소개한다.

“들으니 장흥부사 조희문의 선조는 고려말에 문관으로 부여현감을 지냈는데, 장차 역성이 될 것을 짐작하고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하나의 기(記)를 지었다. ‘우·창 두 왕이 공민왕의 자손인데, 정도전이 신씨(신돈)가 간음해서 낳았다고 무함을 한 것이라고 애통하게 말을 하며 자손들에게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계했다. 그후 자손이 함양에 살면서 열어 보고 후환을 두려워하여 태워버렸다고 한다.”
“북부 참봉 김천서는 점필재 김종직의 증손자인데 나를 찾아 왔다. 내가 그에게 묻기를 ‘점필재가 어느 해에 나서 어느 해에 급제하였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신해년(1431)에 나서 29세 되던 기묘년(1459)에 급제하였으며, 족계(族系)는 「이존록」에 자상히 나타나 있는데, 「이존록」이 지금 장원급제한 정곤수의 집에 있다’고 한다. 무오년(1498)에 이극돈·유자광이 일으킨 사화에 김일손이 옥에서 국문을 당하여 그의 옥사가 마침내 점필재를 부관참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한양에 있는 제자들이 급히 밀양 본댁에 알려 미리 시신을 옮기고 다른 시신으로 대치하여 참형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허봉에게 이 말을 들었는데, 지금 다시 들어 보니 과연 헛말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그때에 후실부인이 연좌되어 운봉으로 귀양가고, 아들 윤은 나이 10세로 너무 어려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위의 사실들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첫번째 내용은 원천석(元天錫)의 「운곡행록(耘谷行錄)」·이덕형(李德泂)의 「송도기이(松都記異)」·「증보문헌비고」 등에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조희문(趙希文)의 선대(先代)에서 부여현감을 지낸 선조의 기(記)를 불살라 버렸다는 내용과 원천석의 증손이 야사 6권을 불태워 버렸다는 내용이 유사하다. 그리고 「미암일기」에 유희춘이 예문관 지고(地庫)에서 「고려실록」을 보았는데, 우왕(禑王)은 공민왕의 아들이라 했다.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미암일기」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내용은 「미암일기」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현재까지 우리는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는 제자와 부인에 의해 이를 모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유희춘은 이 사실을 몇차례에 걸쳐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처럼 유희춘은 「미암일기」에 이같은 사실들을 기록하여 진실을 밝히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진실은 전하는 법이다. 사실을 밝히고 진실을 구명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된다. 특히 중국과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자기들 멋대로 왜곡시키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송재용(동양학연구소 연구실장)
송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