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서울 18. 서울의 숨겨둔 꿈: 친일 모리배의 도시

해방정국에서 친일파 청산문제는 공허한 구호
현실정치 논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이상적 담론으로 내몰아

해방된 서울은 친일 모리배들의 활동무대
‘자주독립국의 수도’라는 꿈은 가슴 속에 묻고


해방이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었다. 일제라는 야만적인 권력이 한반도에서 퇴출 되자 미군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한반도에 진주를 하였다. 해방이 되었어도 민족의 완전한 독립은 요원하였다. 미군정이라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과 함께 한반도는 좌우익의 대립, 친일파들의 득세, 전재민 문제, 토지개혁 문제 등 제 모순들이 분출되어 사회적 아노미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응축되어 나타난 공간이 바로 서울이었다.
해방된 서울은 친일 모리배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다. 채만식의 단편소설 「맹순사」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 때 순사질을 하던 맹순사는 해방이 되자 으슥한 골목길에서 누가 몽둥이로 후려갈기거나 시퍼런 단도로 옆구리를 푹 찌를 것 같은 공포 때문에 옷을 벗었다. 하지만 미군정 치하에서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는 상황이 연출되자 다시 해방조선의 새 순사로 복직한다. 팔 년의 순사경력으로 특채가 된 것이다. “모자도 정복도 패검도 다 옛것이요, 다만 완장 한 벌로써, 해방조선의 새순사가 된 맹순사”를 통하여 해방이 얼마나 허위적인 담론이었나를 읽을 수 있다. 종로 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맹순사 앞에는 행랑아들 노마가 동료 순사로 등장하고, 급기야는 일제 때 살인강도 강봉세 마저 순사가 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친일파의 재등장과 더불어 사회적 가치기준이 착종된 해방직후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맹순사가 종로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것처럼 서울은 지방과는 다르게 친일파들의 활동이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최태응의 단편소설 「강변」에서는 서울이 친일파들의 피난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C면에서 면서기를 하던 A는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자였다. 그의 손에 걸려 “북해주나 구주로 끌려가 말없는 상자 속에 억울하게 도라온 사람들의 영혼”이 부지기수였다. A는 순박한 시골 청년의 시계를 공출을 보낸다는 협박으로 강탈하는 것과 같이 공출서기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어떤 면장은 자다 말고 뛰쳐나가 벌판에서 잠옷바람으로 골이 깨져 죽었고, 어떤 순사는 툇돌을 뽑아 내리 찢는 서슬에 상환이 없어져서 죽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전개된 친일 매국노 응징에 벗어나기 위해서 A는 38선을 넘어서 서울로 도망을 쳤다. 그런데 A가 서울에서 목격한 상황은 그를 어리둥절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원체 일본의 종 노릇을 해도 종 값을 후이 바든 사람들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는 모르나 서울에 백혀서도 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밀려가는 일본 것들과 팻 속이 맞고 동정이 생기고 그래서 그들의 가옥과, 일본 냄새와 일본의 때가 아직도 발려 있는 세간들을 눈알이 불쑤해서 사드리고, 마음대로 내일을 꿈꾸고 있다.

얼어붙은 마포나루에서 A는 친일모리배들처럼 바뀐 현실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자기가 불상하고 눈물겹다”고 탄식을 하고 있다. 우두머리 친일파들은 득세를 하는데 자기와 같은 조무래기 친일파들은 아직까지 방황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한탄이다.
김송의 단편소설 「무기없는 민족」에서도 친일 모리배의 모습이 형상화되고 있다.

“강주사내 뒷집 문간방에 세들어 있는 총독부 양정과에 근무하는 이모는 그 과내의 관리들과 은밀한 가운데 공금을 분배해 가지고 또한 창고의 양곡을 산매하여 한 사람의 몫에 오만원식이나 생겼다는 것이다.······<중략>·····

장차 쫏겨 가는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쓰든 가장 즙기까지도 헐값으로 팔았다. 장서방은 역시 이 기회를 타서 일본집을 집집이 다니면서 오히려 굿찮게 팔라고 성화를 시켜서 매수해다간, 산떼미같이 장처 놓았다. 가엾은 조선 사람들은 선량한 양심조차 그들에게 유린당해 이성을 잃어버리고 오월에 쉬파리 끌 듯 묶여 들어 엎치고 덮치고 사드렸다.”

강주사의 눈에 비치는 해방정국과 서울의 모습은 온통 친일 모리배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미군정이 한반도를 점령군의 입장으로 들어왔고, 한반도 정책의 동반자로 친일파를 중용함으로써 해방 이후 민족 정체성은 끊임없이 산종 하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는 ‘맹순사’나 ‘A’, 그리고 ‘장서방’ 같은 인물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
하지만 서울은 이태준의 「해방전후」나 지하련의 「도정」에서 형상화되고 있듯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한 시민들의 도시이기도 했다. 「무기없는 민족」에서 장서방이 일인의 집에서 고물을 흥정해 가지고 나오는 것을 목도한 전문학교 학생이 “이 죽일 놈 일본놈은 우리 조선을 착취하고 민족을 박해하는 원수다. 원수의 물건을 왜 사는 거냐? 그 놈들이 뉘 돈으로 사십년간 잘산 건지 아느냐? 우리 조선사람의 살과 피를 긁어내서 거들거리고 산 놈들이야!”하면서 장서방을 얼굴을 갈기는 장면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민족 독립국가를 희망하는 시민들의 도시였다.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는 공허한 구호였다. 현실 정치논리는 민족의 정체성이니 민족의 정기를 이상적인 담론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울은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의 수도라는 꿈을 가슴에 숨겨 둘 수밖에 없었다.

장두식(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장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