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숙 - 하루 쉬어 가는 곳

모진 세상에, 시린 바람에
지친 ‘객고’의 몸 하나 뉘었다 가는 곳



간판 하나 내걸고, 걸레질 두어 번 해서,
이부자리 깔아놓으면 여인숙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뉘었다 가는 곳.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더춥다. 3월의 꽃샘추위는. 페인트칠 벗겨진 손바닥만한 창문 안으로 달이 든다. 아무려면 손바닥만 하겠냐만은, 하여튼 옹색한 두 쪽의 유리창은 이 방의 환풍기 겸 숨통처럼 아슬아슬하게 뚫려있다. 이 집 유리창 칸칸 마다 공기가 볼록볼록하게 들어간 녹빛 선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달빛도 차마 밝지가 않다. 그믐날이면 그저 어둑어둑 할 따름이다. 때 묻은 장판에 흔들리는 백열전구 불빛. 천장에 매달려, 쥐들의 동선을 따라 이어진 전기선들은 그저 애처롭다.
그 언저리 불도 잘 들지 않는 방. 오늘 하루도 이렇게 잠잘 수 있는데 감사한다. 모진 세상에, 시린 바람에 얼어 죽지 않고, 이 몸뚱이 하나 가눌 곳 있는 것이 객지 생활에 큰 위안이다. 돌아갈 생각일랑 애시당초 접었다. 성공할 생각도 지금은 없다. 그저 이곳 서울땅덩어리에 흰쌀밥 배불리 먹고, 따끈한 방에서 잠잘 곳 하나 마련하는 것이 소박한 꿈이다.

한 평 반 남짓한 방구석에 보따리 하나 풀고, 옷을 겹겹이 여민다. 내복과 걸칠 수 있는 것은 죄다 걸쳤다. 한밤중 도둑도 그렇고 춥기도 영락없이 춥다. 시골집 벌겋게 달아오른 아랫목이 그립고 생각나지만, 이젠 그 곳도 없다. 비빌 언덕도 없는, 집도 절도 없는 처지에 여인숙 골방도 감사하며 살아야지.
합숙을 하면 값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절반이 뭐냐. 60년대 초, 200원 하던 것이 예닐곱 뭉쳐서 자면 30원이면 족하다. 그래서 몇몇 아는 사람들끼리 끼리말로 "인숙이네 가자"고 하고 사람을 모으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는 일도 태반이다.
그러다 서로의 몸을 부딪히기도 하고, 퀘퀘한 발 냄새 때문에 머리를 앓는 경우도 많다. 낯선 몸과 낯선 몸 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힌다. 썩은 냄새와 몸은 서로 같은 처지임을 아무 말 없이 말하고 있다.

문드러진 발 냄새는 많이도 돌아다닌 탓이다. 발품 팔아 배달도 하고, 공사장을 밤낮으로 다닌게 흙먼지를 뒤 짚어 쓴 것이다. 부서진 손톱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오늘 하루를 기억한다. 내일의 희망은 장판 깊이 박혀 내린 달에게 맡긴 채 말이다.
깨지 말고 꼭꼭 잠들자. 향수에 젖은 뇌리가 툭툭 잠을 건들지만, 잊고 꼭꼭 잠들자. 어둠을 이불 삼아 덮어버린다.
골목골목 즐비한 여인숙(旅人宿)은 잘 곳 없는 노숙자, 여행 다니는 객들, 자식 없는 노인네, 그리고 갓 사랑을 시작한 청춘 남녀가 쉬어 가는 곳이다.
싼 맛에 다니는 곳이고, 어디서나 부담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때론 풋내기 남녀가 한이불을 덮는 곳이기도 하다.
명색이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인데, 사면 벽이 없을 수 없다. 애시 당초 묽은 반죽이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형태의 시멘트 벽은 부스러져 주먹질만 해도 아스르 무너질 심산이다. 누구말에 빌려, 퇴색한 벽이 꼭 늦잠에서 깬 논다니의 화장기 도망간 낯바닥마냥 민주주의로 생겨먹었단다. 그래서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는 곧잘 그 집안 사정을 꿰게 만들고, 여자 두들겨 맞는 소리, 남편 욕하는 얘기들이 다 들려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오늘도 묵고, 내일도 묵을, 또 다른 누군가도 이곳을 다녀갈 터인데 간판 하나 내걸고, 방 몇 개 걸레질해서, 이부자리 깔아놓으면 그게 여인숙이다. 그야말로 한국 정서다. 구름 따라 달빛 따라 나그네 머물 듯이 그냥 쉬어가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렸다 나가는 곳. 그래서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950년대, 광복이후 서울에 가장 많았던 숙박업소가 여인숙이다. 여인숙도 당시에는 여관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값이 여관보다 싼 편이어서 돈이 넉넉하지 못한 서민들이 자주 찾았다.
당시 역 부근이나 시장부근에 자리잡은 여인숙은 대개 한옥으로 되어있었다. 창신동(昌信洞) 부근에 특히 많았고 회현동(會賢洞)과 청파동(靑坡洞) 근처에도 많이 있었다.
서울시의 여인숙 통계를 살펴보면 1945년 여인숙 549개소, 1946년 여인숙 644개소, 1948년도에는 여인숙 575개소 정도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역 부근의 작은 여인숙들 가운데 일부가 사창가(私娼街)로 바뀌면서 숙박행위를 하는 곳도 양태가 조금 바뀌었지만 아직도 서울역 부근 뒷 골목, 상계동, 종로 3가 등지에는 사람들의 쉬어갈 자리를 마련해둔 곳이 간간이 보인다.
서울역 근처 벽산 빌딩 뒷골목. 한산하고 조용하다. 늦게 깬 객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머리를 털고 나온다. 조금만 올라가면 주택가라서 오르막길에는 아이들이 마냥 뛰어다닌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여인숙들은 낮이 되면 조금 한가하다. 석양이 내리고 태양에 그으름이 생길쯤이면, 집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듯 하나둘 이 거리를 찾는다.

“요즘은 러시아 사람들이나, 보따리장수들이 많이들 와요. 여관이나 모텔로 여인숙 들이 많이 전환해서, 이제 서울 시내에선 몇 군데 안남아 있지요. 한달, 두달 집떠나온 사람들이 사글세처럼 내고 살기도 합니다.” 10여 년간 여인숙을 한다는 희망 여인숙 주인의 말이다.
입구에는 고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네 것 내 것 없이, 벗어 놓은 신들과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늘 하루도 잘 곳이 있다는것에 감사하는 듯 보였다. 길지혜 기자
<tameyou@dankook.ac.kr>

▲ 서울역 부근 벽산빌딩 뒷골목에 간간히 눈에 띄는 여인숙은 오늘도 쉼터를 마련하고 있다.
▼ 베니치아의 여인숙이다.


취재일시：2004년 3월 6~7일
취재장소：서울역 부근
벽산빌딩 뒷골목
취재기자：글/사진 길지혜 기자
길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