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누구는 문화제라고 하고, 누구는 불법 집회라 하지만, 광화문에 등장한 수많은 촛불은 누가 뭐래도 각기 다양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표시 행위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을 계기로 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중에는, 물론 특정 정당의 당원도 있고, 탄핵소추 당한 대통령을 후보시절부터 사랑해온 모임의 구성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수많은 군중 속에는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지지하지는 않으나 어찌 ‘나랏님’을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느냐고 비분강개하는 어른들도 있으며, 헌법상으로 탄핵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법학자도 있다. 광화문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 노래부르고 노는 게 마냥 즐거운 어린 아이들도 있고, ‘노빠’들에게 점령당한 거리라고 비아냥거리면서도 탄핵안 가결에는 반대 의사를 표하기 위해 나왔다는 진보 정당의 당원들도 있고, 한총련 활동자금을 모금하는 대학생들도 보이며, 오로지 ‘튀기’ 위해서 온갖 분장을 다 하고 나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탄핵무효, 민주수호’라는 구호 대신 ‘할렐루야, 예수만세’를 목청껏 외치는 청년도 있다. 3월 12일, 국회에서 벌어졌던 일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는 공통점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말 일정을 취소하고 광화문으로 향한다.

촛불 집회는 월드컵 경기 기간 중의 흥겨운 거리 응원과 87년 6월 시내 곳곳을 휩쓸었던 비장한 시위 행렬이 2004년의 광화문에서 합쳐진 형태다. 87년 바로 그 길바닥에서 최루탄을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세대는 이제 국회의원들이 왜 저렇게 싸우냐고 의아해하는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이 거리에 선다. 그 87년의 주역들은 굿거리 장단으로 편곡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영 맘에 들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고, ‘바위처럼’에 맞춰 율동을 선보이는 대학생들이 귀엽긴 한데 좀 경망스러운 것 아니냐며 웃는다. 비장하게 싸우는 데 익숙한 세대들은 즐기며 비웃고 놀면서 조롱하는 이 새로운 시위 문화가 생소하고 낯설다. 한편 젊은 세대들은 노래만 나오면 엄숙한 표정으로 주먹부터 힘주어 위로 치켜드는 어른들을 썰렁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70년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의 몸을 불살라야 발언권을 얻을까말까 한 노동자들은 우리가 죽어갈 때는 돌아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뭐 좋다고 저기 나와서 떠드냐고 원망섞인 푸념을 내놓는다. 외국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자원봉사자들의 능숙함과 기저귀도 채 떼지 않은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촛불을 치켜든다. 그들간의 정치적 성향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미 광화문은 여러 세대와 잡다한 정파들이 서로의 모습을 살피고 소통하며 또한 함께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장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조용히 기다리자고. 4월 15일에 투표하면 된다고. 과연 그럴까. 제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기다리라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들어왔다. 한바탕 말도 안 되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그에 대해 불평이나 비난을 내놓으려 하면, 어김없이 ‘조용히 기다리자’는 말이 되돌아왔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마 사람들은 이제 그냥 조용히 기다리지는 않을 모양이다. 해방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사람들은 그냥 ‘조용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것이다.
한편으론 ‘죽 쒀서 개준다’는 말도 한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판을 벌이느냐는 것이다. ‘죽 쒀서 개준’ 역사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개 먹는 거 무서워서 죽을 안 쑬 수는 없는 일. 개가 먹다가 질려서 조금 남겨놓을 수도 있을테고, 개들의 ‘품질’도 그나마 조금씩 나아질 수도 있을 테다. ‘진보’란 그렇게 구질구질하고 느려터진 것이니 말이다. 아니, 하도 오랫동안 죽 쒀서 개주다 보니 이제는 개들이 죽 쒀서 우리에게 주는 일도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오늘도 사람들은 광화문으로 간다. 이번 국면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건 간에, 광화문에서 촛불로 밝힌 ‘직접 민주주의’의 꿈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광화문의 모임을 단지 동원된 ‘친노’ 세력의 광란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광장’의 경험을 모른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광장’의 경험은 아주 순간적이었으니 말이다. 2004년 봄, 광화문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순전히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자들만의 힘으로 주최한 행사에 수십만이 모여서도 부상자 하나 없이 매끄럽고 깨끗하게 집회를 마친 이 ‘시민들’, 이 ‘광장의 주인공들’이 자랑스럽지 않은가.

성 은 애 교수
<문과대학·인문학부·영어영문학전공>
성은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