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늙은 말의 소원

홍우원(洪宇遠)은 지난주에 소개한 ‘목근침설’ 외에도 ‘노마설(老馬說)’이라는 우언을 남겼다. 어려운 시기에 모든 것을 다 바쳐 도와주었건만, 쓸모없게 되자 냉정하게 버려 버리는 인간의 비정함을 빗댄 글이다.
숭정 9년(1636) 4월 어느 날, 주인이 종 운(雲)을 시켜 마구간에서 늙은 말을 끌어내도록 했다.
“갈기말아, 너는 이제 나이를 먹을대로 먹었고 근력도 쇠할대로 쇠하였구나. 너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고, 높이 뛰어오르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없겠구나. 너에게 수레를 끌고 험한 산길을 가도록 한다면 넘어지고 자빠져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가도록 한다면 고꾸라져 짐에 깔려 죽고 말겠구나. 그러니 너를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푸줏간에 넘겨 너의 고기와 뼈를 가르라고는 차마 하지 못하겠고, 시장에 내어다 팔려 해도 누가 너를 사겠느냐? 갈기말아. 이제 재갈을 벗기고 굴레를 풀어서 자유롭게 해줄 터이니, 너는 이제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거라. 너에게서 더 이상 취할 것이 없구나.”
말은 알아듣기라도 하듯 귀를 늘어뜨리고, 하소연이라도 하듯 머리를 쳐들고는 한참을 주저주저하며 몸을 펴지 못하더니, 입으로는 말을 하지 못하는지라 가슴속에 쌓여있는 심정을 억대(臆對)하여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허나 주인님도 너무하십니다 그려. 제가 한창 젊었던 때는 하루에 백 리를 치달렸으니 걸음걸이가 그렇게 굳셀 수가 없었으며, 또 한번 짊어지면 몇 섬의 곡식 실을 수 있었으니 제 힘이 얼마나 강했습니까. 그때 주인님께서는 얼마나 가난하셨습니까. 쑥대가 무성한 집안은 처량하기 짝이 없고 텅 빈 살림살이는 얼마나 쓸쓸하였습니까. 바닥 난 쌀독엔 한 됫박의 쌀도 없고 고리짝에는 비단 한 조각 없질 않았습니까. 삐쩍 마른 마누라는 굶주림에 허덕이다 바가지나 긁고, 딸린 자식들은 너나없이 밥 달라 징징거리며, 죽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이 집 저 집 동냥을 해서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때 제가 있는 힘을 다해 동분서주하지 않았습니까. 주인님께서 남으로 가라면 남으로 가고 북으로 가자면 북으로 가기를 시키시는 대로 했었습니다. 멀리는 수천 리, 가깝게는 수십, 수백 리를 지고 나르며 달리고 치닫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지요. 주인님의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온전히 부지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제 덕분이었습니다. 길에 쓰러져 굶어죽거나 곤궁하게 떠돌다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처박혀 죽지 않은 것도 모두 제 덕이었습니다. …(중략)… 헌데 지금 주인님께서는 저의 노고와 공이 이와 같이 큰데도 변변히 먹여주기는커녕 이렇게 푸대접을 하시니,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여물 한 소쿠리와 물 한 사발만 주고는 재갈과 굴레를 씌우고 채찍으로 때리는가 하면,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고 달리게 한 것이 그 얼마입니까. 그러니 내 비록 나이가 젊다고 한들 어찌 고달프지 않으며, 쇠약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젊었을 때 그 기력을 다 부려먹고 늙었다고 내버리는 짓은 어진 사람이나 군자라면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주인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려 하니, 너무 하십니다 그려. 내 아무리 늙었다 하나 아직 식성이 왕성하니, 주인님께서 특별히 마음을 써서 나를 길러주신다면, 풀만 먹어도 허기를 면할 수 있고, 시냇물만 먹어도 갈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히 쉬게 하여 쇠약해진 기력을 회복하고 저의 힘을 헤아려 짐을 싣고 재주를 헤아려 부리신다면, 늙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떨쳐 일어나 크게 울어 젖힐 수 있으니, 주인님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여생을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설사 저를 버리신다 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제 발굽이 서리와 눈보라를 헤쳐 나갈 만하고 갈기털 또한 찬 바람을 막을 만합니다. 들판의 풀을 뜯어먹고 냇물을 마시면서 제 한 몸 온전히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이 탄식하였다.

“내가 잘못했구나. 너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길을 잃었을 때, 관자(管子)라는 이가 늙은 말을 풀어놓아 그 말을 따라 가라고 하였다. 관자야말로 늙은 말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쓸 줄 아는 이였기에, 능히 그의 임금을 보필하여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늙은 말이라고 하여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는 운(雲)에게 말했다.
“저 말을 잘 먹이도록 하라. 다시는 말이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윤승준<교양학부·강의전담>초빙교수
윤승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