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누구에게나 수중한 추억과 붙잡고 싶은 삶이 있듯이
자잘한 일상에의 천착으로 ‘봄날은 간다’

평범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한다.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행복에 몸을 떨기도 하면서 연애를 한다. 어떤 커플은 헤어지고, 어떤 커플은 사랑을 이룬다.
이처럼 단순한 내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아왔던 사랑은 거의 주인공이 특별한 지위를 가졌거나, 개성이 강했고, 상황이 특수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자가 조직 폭력배인데 사랑에 빠진다거나 <약속> ,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아파서 죽을 위기에 놓여있다거나 <국화꽃향기>, <편지> 등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위의 두 경우를 포함하지 않는 설정이라도 남자나 여자가 굉장한 엘리트 혹은 부자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주인공들은 우리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캐릭터로 설정되고, 주인공들이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헤어지는 또는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네 사랑을 영화라는 틀로 포장시키지 않고, 진솔한 시선으로 세세하게 짚어 가는 이런 영화들은 리얼리즘 영화가 그렇듯이 다소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내 옆에서 살아가고 있을법한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에 쉽게 동화되고, 잔잔한 감동을 통해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우리는 이렇듯 포장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허진호 감독은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7)에서는 사진사를 통해 그가 찍는 사진들이 순간을 포착해서 기억을 간직하려고 했던 것처럼 「봄날은 간다」(2001)에서는 잊혀져 가는 녹음기에 담겨진 소리 속에 사랑의 감정을 담고 표현하고 있다.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는 사랑하고 헤어지는 젊은 두 연인의 매력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는 절제된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봄날의 의미를 행복한 사랑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상우는 그런 행복한 사랑의 순간들의 과정을 ''''녹음기''''속에 담아두게 된다. 그리고, 봄날이 이미 지나가 버렸을 때 그는 어느 날 문득 녹음 테이프를 정리하다가 그 안에 담겨있는 지나간 봄날(사랑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상우의 사랑이 녹음기에 담겨진 소리를 통해 사랑의 감정이 담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고 생각한 사랑이 기억으로 돌아 올 때 변하고 잊혀졌다고 생각해도, 사랑은 언제나 기억으로 되살아 온다.
이 영화는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허황된 사랑과 행복한 결말이 비꼬듯 사랑의 감정과 행위를 그저 보편적으로 평범하게 바라보고 있다.
달리던 버스를 세우고 내려서 “헤어지자”라고 말하는 은수에게 “내가 잘할게”라고 상우는 담담히 대답한다. 이렇게 관객의 가슴속에는 격양이 일어도 배우들은 그저 풍경 속에 말없이 천천히 움직일 뿐이다. 그렇게 관조적인 영상은 화면의 여백을 통해 사랑의 빈자리를 명상한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동감하고 마음이 저리는 이유는, 어느 누구든지 담고 싶은 소중한 추억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느 누구든지 삶에 붙잡아 두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봄날의 행복은 조금씩 더운 열기 속에 시들어 버린다. 다음 해에 봄이 찾아와도 그 때의 행복했던 봄은 더 이상 그 여운을 남기지 않기에 그저 마음 속에 담아 둘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고 감독은 그 사랑과 시간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조용히 담아낸다.
「봄날은 간다」는 우리의 연애에서 지극히 중요하고 결정적이었으나 대다수 멜로드라마 속에서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현실적인 모습들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려 귀하게 다룸으로써, 실제 연인들을 웃기고 울리는 것은 사별이나 불치병, 배신, 동화 같은 프로포즈 등의 이벤트가 아님을 알고 있는 관객을 적잖이 감동시킨다. 허진호의 영화는 한편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등장했던 잔잔한 리듬, 자잘한 일상의 천착을 미덕으로 내세웠던 일련의 멜로드라마와도 금을 긋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역시 사소한 스케치로 장면 장면을 채워가지만 그것들은 그저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포개지고 응결되어 죽음과 사랑에 대한 하나의 신중한 ‘견해’로 결정(結晶)을 맺는다.
이상지
<대중문화예술대학원·공연예술학과·석사과정5>
이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