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은 세속의 명예와 부귀를 탐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평생 독서와 문장, 후진 양성에 몰두한 인물이다. 그의 『눌은집(訥隱集)』 권 21 『만록』에 실려 있는 망양록(亡羊錄)은 21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우언집이다.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은 망양록에 수록된 우언에 대해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뜻을 은근히 담아냈다.”고 평한 바 있다. 오늘은 그 가운데 개미를 소재로 한 우언 한 편을 소개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개미는 지능이 있어 반드시 보답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 말은 개미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나는 만물 가운데 가장 추악한 것이 개미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나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수많은 개미들이 땅 위를 새카맣게 뒤덮은 채 앞뒤로 부지런히 오가고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개미들은 모두가 개미알을 하나씩 품에 안고 있었다. 개미들이 나오는 구멍을 찾아가 파내고 보니, 그 속에는 죽은 개미들이 무수하였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은 모두 개미알이었다.
개미들이 떼로 몰려와 개미알을 도둑질해 갔을 뿐 아니라 개미알을 마구 해치고 죽였으니, 개미알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미들이란 그들의 원수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알에서 깨어나 개미새끼가 되어도 원수를 갚을 줄 모르고, 장성해서는 그 스스로 남의 개미알을 도둑질하고 해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니, 이런 놈들은 죽여 없애야 마땅하지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혹자가 말하였다.

“개미 가운데에는 그렇지 않은 놈도 있으니, 제법 몸집이 크고 날개가 있는 놈과 머리가 붉고 개밋둑을 만드는 놈들이 그런 놈들이오. 이 놈들은 날이 맑을지 흐릴지를 알아서, 비가 오려고 하면 둑의 구멍을 미리 막아 버린다오.”

사람들은 개미가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원수를 갚을 줄은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경험한 일을 토대로, 그 같은 생각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개미란 놈은 자기 형제를 죽이고 제 목숨까지 위태롭게 했던 원수에 대해 원한을 갚을 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처럼 남에게 원한을 사는 짓이 당연한 것인 양, 자신도 태연히 똑같은 짓을 저지르며 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처럼 못된 놈이 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나의 주장에 대해서 개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하는 혹자도 있다. 세상을 너무 하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야기 속의 내가 주장하는 것이 꼭 미물인 개미의 세계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생각해 본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그같은 일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나의 일상 속에서 그같은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진실은 하나인데, 그것을 둘러싼 생각과 주장이 한결같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런데 과연 진실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 또한 옳은 주장일까? 눌은은 개미 이야기를 빌어 흑백 논리로 세상사를 판단하고 사람들을 구분하던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흑백 논리의 노예가 되는 순간,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는 넓은 시야는 사라지고 한 쪽의 진실에는 눈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비단 눌은이 살던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윤승준<교양학부·강의전담>초빙교수
윤승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