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따라 오고 가는 나그네처럼 여유롭고,
간단하게 한옥 마을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전주 중심거리에 자리 잡은
풍남문에서 동편으로,
한옥 8백여 채가 고스란히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차창밖에는 황금벌판의 건강한 벼가 되기를 기다리는, 초록 모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봄바람이 물 속 양분 농도를 맞추고, 새 땅의 파릇한 기운이 풀풀 하늘로 솟아오른다. 나풀대는 벚꽃 잎은 보는 이의 마음을 한층 벅차게 한다.
완연한 봄이다. 두터운 외투를 세탁소에 맡긴지 오래 전인데, 피부에 와 닿는 봄내음은 오랜만이다.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어내려 드넓은 논 밭 위를 거닐고 싶어 졌다. 도심을 벗어나 떠나는 여행의 설렘은 한결같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 목적지가 자연을 닮아 있는 곳일수록 더욱 그렇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뿌연 도시냄새도 어느덧 봄과 섞이는데, 전주의 시가지가 보이기 직전까지 그야말로 한적한 농촌에서 느끼는 봄의 향연을 그대로 맛볼 수 있었다.
새색시 안채 가듯, 버선발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가롭고 조용한 양반도시 전주(全州). 전통과 알맞게 조화를 이룬 이 도시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었다. “전주한옥마을이요. 아저씨.”
빨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던지 택시를 잡아타고 한걸음에 내달렸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도 않는,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는 한복 곱게 차려입은 안방마님 같은 정갈한 곳이었다.
조선시대 전주부성(全州府城)의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풍남문(豊南門)에서 군산을 향해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팔달로에 위치한 전주한옥마을. 주변에 전북도청과 전북지방경찰청, 은행 등이 즐비한 전주시의 중심 거리에 자리 잡았다. 이곳이 정말 인구 60만 명의 전주시내 한복판이 맞는가. 보이지 않는 유리막이 한옥마을을 덮은 것처럼, 도심과는 구별된 한가롭고 여유로운 자태였다.
그 때문인지 방문객들의 표정은 풍유시인처럼, 지난 세월 속에 겪었던 모진 일은 잊어버리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와 같았다. 중절모 눌러쓴 백발노인은 시 한편 읊조릴 태세였다. 그만큼 전통과 옛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정취를 자아내고 있는 한옥마을이었다.

팔달로 주변의 풍남문에서 동편으로 2백 여m 가 안 되는 곳에 한옥 8백 여 채가 고스란히 모여 있다. 미동도 하지 않고, 꿈틀대지도 않는다. 마치 터줏대감인냥 전주를 지키고, 전통을 말하고, 사람냄새를 풍긴다. 방구석의 문갑, 경대, 사방탁자, 병풍, 사방의 나무기둥 등은 시멘트 콘크리트 벽에 사는 우리세대에겐 낯설지 모르나, 마치 오랜 세월을 대하고 사용한 것처럼 친근하기만 느껴진다. 떠오른 정오의 해가 한옥마을전체를 감싸고, 마당에 드리운 따사로운 햇볕이 집안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문살과 창호지에 투명한 빛을 내리고, 정갈한 기와도 반짝인다.
한옥마을을 안내하는 옛책을 보면, 이곳은 가구 당 규모가 50∼60평 정도며 옛날 중인층이 살던 마을로 고관대작이 살던 으리으리한 반촌은 아니라 한다. 하지만 전주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고 아직까지 깊고 깊은 숨을 쉬고 있다.
일제시대. 전군가도를 뚫으면서 성곽이 헐리고 그 바람에 성안으로 일본 상인들이 하나둘 진출하면서, 1930년대 이에 반발한 전주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마을이 바로 여기다. 그 후로 개발 바람이 불기 이전인 1977년에 ‘한옥마을 보존지구’로 묶여 현재까지 이 모습을 보전하고 있다.
한옥마을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 개보수를 하는 집도 눈에 띄고, 새기와를 올리는 집도 있다.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발소도 있고, 대나무가 하늘로 솟은 점집도 간혹 보인다. 처마 밑이나, 문살 밑에 부적을 발라놓은 집주인들이 점 집을 들락거리기도 했겠지. 눈에 보이지 않는 ‘신(神)’을 믿고, 강신(降神)한 무당을 찾아가 살아갈 방도를 구하는 것은, 이내 사람들이 이성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서가 아닐 게다.

집안의 조상을 섬기고, 곳곳에서 집을 지키는 주신에 대한 믿음, 바로 한국인의 정서가 깊이 베어 나오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작은 학교도 있고, 없는 것 없는 구멍가게도 있다. 한옥마을 땅 밑으로 뿌리내린 나무들이 동산을 이루며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한 20년 살았지. 살던 곳이니까 지키고 사는 거지 뭐. 개발이 안 되어서 사람들이 예전만큼 많이 살지는 않아. 돈 많은 한량들이 공기 좋은 곳에서 살려고 가끔 찾아오기도 한다우. 그래도 살던 가닥이 있다보니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못살겠어. 처마 밑에 고드름 얼고, 때 되면 마당에 참새 찾아오는 이곳이 아직은 살만하네.”
지나가던 노인을 불러 세워놓고 한옥마을이 어때요 라고 묻던 참이었다.
담이 없어도, 남의 땅, 자리를 기웃대지 않는 한옥마을 사람들. 기와의 곡선과, 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을 보기 위해 동산으로 올랐다. 8백여 채의 집들과 탁 트인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루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곳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바쁘게 스쳐 가는 정도로 이곳을 보면 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지붕의 새집을 보지 못하고, 기둥에 박혀있는 선조의 숨결도 느끼지 못한다.
조선시대 전통주거문화가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 객사, 풍남문,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무형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이곳에서 전통문화의 숨결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전주시는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하도록 찾는 이들에게 갖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마을 한쪽 편 마당에는 널뛰기와 투호 놀이, 그네 타기 등을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 한마당이 차려져 있고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술 익는 냄새가 진하게 흘러나오는 전통 술 박물관의 모습이 보인다. 전통 술 박물관에는 막걸리와 청주가 같은 술독 안에서 얻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청주가 불을 만나 소주가 되는 절차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한나절 한말 땀 흘리고 일한 농부들이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킬 때의 그 맛을 안해본 이가 알까. 술맛도 열심히 일 해보면 알게 되고, 그게 약주인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알수 있을까. 오후 3시 무료 술 시음회가 열려 한잔 들이켰다. 구수하고 삽싸름한 전통 술맛에 한동안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한옥마을과 담을 같이 하고 있는 전주공예품전시관은 공예관과 공예전문갤러리 기획관 뿐만 아니라 방문객들이 한지공예, 도자 공예, 목공예, 전통자수공예 등을 전문가에게 배워보는 체험관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마을 정자 밑에는 동네 노인들이 장기판을 벌이고 있다. 훈수 두는 노인들이 더 많다. 장이요. 멍군이요. 큰소리 내며, 그들은 그들만의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복잡하고, 모질어도 구름 따라 가는 나그네처럼 전통을 지키는 마음으로 삶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아쉬운 여정이었다. 우연히 맡은 이곳 냄새 중에, 깊은 산속 옹달샘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은 순수함을 맡을 수 있었다.
<글/사진 길지혜 기자> tameyou@dankook.ac.kr


전주 한옥마을에는 전주시에서 마련한 전통문화체험관이 있다. 그 곳에서 차도 마시도, 널도 뛰며 우리네 고유 전통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길지혜 기자>  tameyou@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