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게딱지 만한 천막집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속물주의가 펼쳐놓은 부조리가 엄습한 서울의 잔영


주인공 진영의 독백 “내게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1953년! 참혹한 한국전쟁이 드디어 끝났다. 하지만 종전이 아니었다. 휴전이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 이때부터 남과 북의 현대사는 기형적으로 전개된다.
휴전 후 서울에서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생명을 빼앗아가는 전쟁은 멈추었지만 생명의 존엄성을 무참하게 짓밟는 생활이라는 전쟁. 당대 서울을 규정한 것은 고전적인 의미로서의 하부 토대였다. 경제가 문제였다. 따링 누나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향하는 ‘쇼리킴’의 행로에서 별 한 점 없이 깜깜한 밤하늘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은 게딱지만한 천막집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들 꽃 한 송이 나무 한 뿌리 볼 수 없는 이곳에는 벌서 하나의 빈민굴이 형성되어 있어 말이 산이지 이미 산이 아니었다.
짜짜하게 괴인 샘터에서 물을 긷는 거미같이 가늘은 소녀의 팔, 천막집 속에서 내미는 누렇게 뜬 얼굴들-진영은 울고 싶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서 집을 나와 산으로 올라온 자기 자신이 여기서는 차라리 하나의 사치스런 존재였다는 것을 뉘우친다. (<불신시대>)

서울 산들은 이제 시인 이성복이 노래한 정갈한 나무가 있는 그런 산이 아니었다. 아들 잃은 어미의 슬픔조차 끼어들 수 없는 궁핍한 산. 남산은 거대한 빈민촌으로 변하고 있었다. 궁핍은 모든 가치를 속물화시켰다. 생존만을 목적으로 하는 생활은 아름다운 가치들을 대부분 투기해 버린다.
박경리의 <불신시대>는 속물화된 서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전쟁 통에 남편과 사별한 진영. 악몽 같은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왔으나 아들 문수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된다. 진영은 아들을 여읜 슬픔보다도 엑스레이도 찍어보지 않고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뇌수술을 감행하는 병원의 부조리 상황에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아들 문수는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그렇게 덧없이 죽어간 것이다.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는 서울은 재빠르게 속물주의로 구조화되고 있었다. 같은 성당 신자라고 믿고 다니던 Y병원에서 주사 한 대 분량의 스트렙트 마이신을 3분의 1만 놓아주는 파렴치한 짓을 하는 것을 목도했고, 새로 찾아간 S병원에서 동네 건달꾼이 의사 까운을 입고 진료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진영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진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온톤 협잡과 부정이 가득 찬 세상이었다. 아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찾아간 성당에서는 잠자리채 같은 연금 주머니가 당연하게 돌아다니고, 백중 날 찾아 간 절의 중들은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관심을 가진다. 종교조차 인간적 가치를 외면하고 물질적 가치에 집중하는 상황. 신용보증으로 종교보다 더 실한 게 없다는 진영의 비꼬는 말 속에는 당대의 부조리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원자전쟁의 최후파멸의 그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그날 내 떨어진 팔다리를 이끌고/땅을 ？어 기어든 산골짜기 거기/호젓이 피어있던 꽃/가녈피 이파리를 흔들며/헐떡이는 내 어깨를/지키고 가만히 서 있던 꽃//죽은 애의 버린 애의 멍든 눈이냐/희멀거니 멀거니 열려 있던 꽃!/ (유정, <최후의 꽃> 부분)

시인 유정이 노래한 ‘최후파멸의 그날’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상황이 끝나자 속물주의가 펼쳐놓은 부조리가 엄습한 서울. 거리는 환멸만이 흘러넘칠 뿐이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죽은 애의 버린 애의 멍든 눈과 같은 최후의 꽃’ 속에는 구원의 빛이 없다는 것이다. 종말론 속에 윤리와 구원의 메시지가 없다는 것은 비극이다.
하지만 구원은 받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진영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

산등성이에서 바라다 보이는 시가는 너절했다. 구릉을 지운 곳마다 집들이 마치 진딧물 모양으로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그 속에는 절이 있고, 예배당이 있고, 그리고 서양적인 것, 동양적인 것이 과도기처럼 있고, 조화를 깨뜨린 잡다한 생활이 그 속에 있었다. 이러한 도시 속에 꿈이 있다면 그것은 가로수라고나 할까! 보랏빛이 서린 먼 산을 스쳐 지나가는 구름이라고나 할까.(<불신시대>)

서울 시가를 내려다보면서 불신의 끝과 만나는 진영. 너절한 시가지, 위선의 종교 공간들,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의 무원칙한 결합 속에 사라져간 정체성, 인간적인 가치가 속물주의 속에 무너져버리는 시대 속에서 가로수를 발견한다. 흘러가는 구름을 주목한다. 그리고 진영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의 독백과 같이 진영의 이러한 다짐은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보여준다. 불신의 시대에 새 생명의 씨앗은 믿음직스럽게 발아를 하는 것이다. 서울은 생명의 씨앗이 자라날 튼튼한 텃밭인 것이다. 무참히 죽어버린 추억은 기름진 거름이 될 수 있다. 궁핍한 서울은 번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장두식(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장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