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놀음, 더럭 겁 났다


세상을 살다보면 남들과 달리 취급받는다는 게 불편할 때가 많다. 나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많은 장소에선 조금 긴장하게 된다. 이 긴장이 우발적으로 부서지며 분위기가 부드럽게 전환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예외 없이 내가 그곳에 모인 여성들과 별 차이 없는 존재로 새삼 자각되는 순간이다. 억눌렸던 자기 표현이 자연스레 이뤄지고 상대방에 대한 경계가 늦춰지기에 친밀함도 두터워진다.
그런데 일상이라는 미시적 환경이 일종의 권력 관계의 그물로 촘촘히 엮여있다고 한다면 대인관계의 연속인 사람살이란 끝없는 스트레스의 연속일 수밖에 없을 것도 같다. 이런 스트레스는 나와 다른 상대의 차이를 못 견뎌할수록 가중된다. 때문에 이 미묘한 불안을 척결하기 위해 내가 상대방에 동화되기도 하고 때론 후덕한 상대방이 내 비위를 맞추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만남에는 향기가 없다. 간혹 싸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길 때가 있긴 하지만 영 뒷맛이 좋지 않다. 냉정한 계산과 후환을 염려한 뻔한 인사말로 겨우 미봉되는 이런 관계는 끝내 삶의 보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우리는 조금씩 다르고 또 다르기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더러 서로에게 불편함을 초래하긴 하지만 이 불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다르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사실, 서로가 예민한 지점에서 구별된다는 사실은 영 뒷맛이 좋지 않은 무차별적 동일화를 방지해 주는 미덕이 있다. 차이를 경유하지 않는다면 의미 있는 공통점도 발견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가치 있는 인격적 하모니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들 사이에서 내가 유니크한 남성성을 견지하면서도 여전히 이질적 존재로 소외 받지 않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나의 말문이 트여지곤 했던 것이다.
사람이 늙었다는 징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말투가 어눌해지고 피부는 거칠어지며 동작은 둔중해져 굼떠 보인다. 그런데 그런 표면적 요소들보다 더 본질적인 징표는 새로운 것을 불편한 차이로 느끼고 이를 배제하려는 완고한 태도일 것이다. 물론 같은 노인임에도 어떤 분들은 마주한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활력과 열정을 지녔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그것이 그/그녀의 육체적 생명력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그런 분들은 대개 자신과 상대와의 차이에는 매우 민감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즐기려는 대범함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그녀와의 대화는 즐겁다. 그들은 낯선 이의 이질적인 측면을 무시하지 않으며 이를 존중하고 나아가 그 내부에서 창조적 유익을 뽑아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도덕적 우열이 모호한 국면에서의 차이일 경우, 그것들은 삶의 새로움을 엿볼 소중한 기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이를 향유하는 능력은 협상의 능력이기도 하다. 이기적 계산법의 테두리 안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자세는 협상을 끝도 없는 줄다리기나 파국으로 몰고 갈 뿐이다.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고 그 논지의 틀 내부에서 즐겁게 버티다보면 어느덧 상대도 내 관점의 이면 안으로 스며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타자의 존재를 묵직하게 인정하고 그것과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적어도 소모적인 분쟁만은 피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다른 점을 막연한 위협으로 이해하여 방어적이 되는 사람은 행복한 협상의 미덕을 모르는 자다.
협상 능력의 부재는 개인적으로는 이혼이나 절교와 같은 비극을 낳고 국가적으로는 황당한 내분이나 전쟁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폭력은 격조 있는 협상력이 부재하거나 그 필요성을 포기하는 순간 저절로 초대되는 불청객이다. 지루한 협상 과정을 생략하고 문제를 단숨에 매듭지으려는 초조함이 우리의 일상을 불행하게 만들고 연이은 물리적 폭력을 재생산한다. 위대한 결단이나 단호한 선택 뒤에는 이러한 너그러운 협상의 예술이 밑받침되어 있어야만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검술의 달인이 오랜 숙고와 망설임 끝에 칼을 뽑을 때, 그 칼이 지니는 의미의 두께가 그제야 형성되어 이후의 그/그녀의 행동이 막된 칼질이 아닌 하나의 결의, 하나의 자기 표현으로 승화되는 이치와 같다. 결국 이 검객의 날쌘 동선은 협상 과정의 연장이며 절제된 공격에 의해 수행되는 폭력의 종식이다. 이는 폭력으로 보이지 않기에 다른 폭력을 부르지는 않는다.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전쟁놀음을 지켜보며 한없이 참담하다. 때로는 과연 미국이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문화적 원숙함을 지닌 나라인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물론 나와 다른 것은 처음엔 다 무섭다. 그러기에 악수를 하고 통성명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묻는 것이 아닌가! 전차를 몰고 진압하기 전에 그런 노력 정도는 했어야 옳았다. 그들이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그런 정도의 이해밖에 할 줄 모르는 나라가 아닐까 겁이 더럭 났다. 정말 겁이 났다.
윤채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