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슬로우, 퀵 퀵 !” 나락(奈落)으로 추락하는 댄스스탭
오선영은 댄스홀과 ‘25시 다방’을 부엌으로부터의 탈출구로 생각했다


자유부인은 대학생 신춘호, 사기꾼 백광진,
파리양행 점주 한태석을 만나 파멸의 길로…



6 25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된 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이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면,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등장하는 대한민국 상류층들의 삶은 전쟁 직후의 생존본능으로부터 비켜서 있다. 삶의 막바지에서 몸부림치는 이들의 생존에 대한 본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들의 삶은 유흥의 도시 서울에서 뒷전에 놓인다. 이에 비하여 서울의 상류층들은 ''''상시선(전력 부족의 상황에서 관료, 자본가 등의 특권층에게 상시적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특별한 전력선으로 특권층의 상징이었다)''''으로 대변되는 특권 속에서 허영과 욕망을 분출한다.
''''화교회''''라는 특정 학교의 선택된 동창들만이 참가하는 모임은 권력층들의 아내이자 여남동권(女男同權)을 주장하는 부르조아 유한 마담들의 자기과시의 장이자 은밀함을 공유하는 이들의 사교공간이다. 일주일 분의 부식 값을 서슴없이 내놓으며 ''''오선영''''이 ''''화교회''''에 가입하는 것은 이러한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보다 비싼 회비를 내고 적을 올리는 이유는 이곳이 특권층끼리의 정보 공유의 장이기 때문이다.
''''화교회''''에 모인 유한마담들이 쏟아내는 자기 과시의 말 속에서는 당시 상류층들의 허위의식이 담겨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사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지배계급의 의식이 유구한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전쟁을 겪으면서 한 자리나, 한 몫을 챙겼던 이들 계급은 ''''물 건너온 것''''의 소비를 통하여 자신을 과시한다. 수작을 걸기 위해 일 주일 치 부식 값의 10배에 해당하는 화장품값을 선뜻 지불하는 이들의 과시욕에 비하여, 늙은 애인에게 선물로 받은 화장품을 바로 돌아와 도매 값으로 되파는 젊은 처자의 영악함은 삶의 몸부림으로 읽혀진다.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 유한마담들의 모습에서 전쟁 이후의 서울이라는 공간은 ''''돈 놓고 돈 먹기''''의 공인된 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화교회'''' 성원들 틈에서 상대적으로 ''''가난의 비애''''를 느낀 ''''오선영''''이 이들과 같이 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봉건시대의 의식으로 치부하고 절연하는 것이다.
''''어제의 악처가 오늘의 현부도 될 수 있고, 오늘의 가정부인이 내일의 매소부로 전락할 소질을 지니고 있는'''' 것을 행복한 건망증으로 인식하는 가치 부재의 시대가 열리면서 1954년 한국판 ''''인형의 집''''을 나온 ''''노라''''는 욕망으로 점철된 거리를 헤맨다. 그렇지만 서울의 거리를 활보하는 아베크의 무리들 속에서 전문대학 졸업 후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며 지내온 자신의 삶에 대하여 ''''노예''''로 인식하는 ''''오선영''''의 모습에서 입센의 ''''노라''''와 같은 진정성은 찾아볼 수 없다.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에서 드러났던 식민지 근대 여성의 위치와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이지만, 아주 가까운 지점에서 ''''오선영''''은 위태롭게 서있다.
''''오선영''''이 서 있는 6 25전쟁이 끝난 직후의 서울에서 대한민국의 상류층들은 전쟁 중에 드러내놓고 누릴 수 없었던 향락의 자유를 분풀이 하듯 분출하고 있었고, 댄스는 거센 유행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선영''''에게 댄스는 이러한 거짓된 욕망을 해소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과거를 보상하는 현실의 신기루이다. ''''돈 삼백 원으로 휘황찬란하게 비치는 오색 전등 밑에서 바깥의 추운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 안의 훈훈하고 향기로운 공기를 맡으며, 댄스는 혁명의 제일보''''라는 신념 속에서 자신의 몸뚱이를 던지는 이들 속에서 추락한 이성의 권위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댄스에 심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일제가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금욕주의 문화정책을 펴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희생양이 되었던 ''''댄스홀''''은 전쟁이 끝난 후 밀려 들어온 미국대중문화의 범람과 함께 욕망의 해방구로 자리 잡게 된다. 1930년대 ''''부엌으로부터의 탈출''''을 근대적 여성이 되기 위한 일차적인 과제로 설정했던 신여성들이 ''''댄스홀''''을 근대문화의 해방공간으로 왜곡해서 인식한 것처럼, 해방 이후 ''''댄스홀''''은 현실 속의 낙원처럼 등장한다. 마치 ''''남녀 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그림들이 여러 장 걸려있는 단성사의 광고판''''처럼 ''''댄스홀은 몇 세기나 진보한 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로 인식되는 것이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의 스텝에 맞춰 이성의 몸이 다가오는 것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진화(?)된 ''''오선영''''에게 있어 또 다른 욕망실현의 접선 장소가 되는 ''''25시 다방''''은 현실의 시간을 뛰어 넘는 허위의 장소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대학생 ''''신춘호'''', 사기꾼 ''''백광진'''', 파리양행의 점주 ''''한태석''''을 만나 자유가 아닌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실재하지 않는 ''''25시''''가 의미하듯 ''''오선영''''의 욕망은 삶의 기반에서 유리(遊離)되며, 더욱 더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락의 길로 추락한다.
타락한 프리메이슨(Freemason)인 ''''화교회''''에서 자신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했던 여인의 말로는 회개하면서 돌아오는 탕자가 되어 신파적으로 해소된다. 그러나 그녀가 개과천선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전쟁 직후의 서울에서 나타난 빈부격차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에도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우리들 삶의 근저를 흔들고 있다.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