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시대는 갔다’ 천만에 ‘역시 김수현이다’


TV가 우리의 여가 생활을 독차지하는 시대에 드라마는 없어서는 안될 휴식처이다. 하루에도 드라마를 지상파에서만 9개 이상 볼 수 있고, 주중에 깜빡 잊은 사람들을 위해 친절히도 주말에 재방송까지 보여준다. 이처럼 쏟아지는 드라마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떤 드라마를 볼 것인가 적잖은 고민을 하게된다.
‘어떤 드라마를 볼 것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누가 나오느냐?’이다. 어떤 스타가 나오느냐에 따라 그 드라마의 내용에 관계없이 첫 회 시청률이 나오는 경우가 허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나오느냐?’가 선택의 기준이 아닌 드라마가 있다. 바로 김수현의 드라마이다. 그녀는 ‘누가 썼느냐?’를 선택의 기준으로 만든 최초의 드라마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김수현이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과연 그녀의 필체에는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하면 대화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만들어 내는 드라마마다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막을 거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90년대 이후 김수현의 드라마는 비극적 드라마와 희극적 드라마로 그 양상이 정확히 구분되어 진다. 비극적 드라마로는 「청춘의 덫」,「작별」,「불꽃」, 최근작인 「완전한 사랑」등을 들 수 있고, 희극적인 드라마는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사랑하니까」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내사랑 누굴까」의 경우는 전체적으로는 희극적 드라마에 속하나 내용상 비극적 요소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여러 개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끔 한다.
드라마를 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펙터클과 비례하여 서스펜스가 있거나 웃음과 눈물처럼 안면을 일그러뜨리는 것은 재미영역을 크게 점한다. 김수현의 인터뷰 내용을 본다면 그녀의 드라마들이 왜 극단적 두 양상을 보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란 심심할 때 보는 것. 인기의 비결은 따로 없고 시청자들을 부담 없이 유쾌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특별히 강요하는 메시지도 없고…”
즉, 김수현은 시청자들의 재미를 위해 또 다양하고 더 많은 소재거리를 위해 코믹한 홈드라마 형식이나, 눈물샘을 자극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비극형 드라마를 쓰고 있다. 김수현은 드라마의 기본적인 요건을 가장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김수현 드라마의 매력은 대사에 있다. 배우들의 말에서 우리는 그녀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호칭을 듣는 것도 다 생동감 있고 직설적인 대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지 날카롭다라는 표현만으론 안 된다. 그녀의 대사는 사고와 언어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고 어렴풋이 맴돌고 있는 생각들을 평이한 언어로 분명하고 아주 빠르게 거침없이 내뱉는다. 추상을 끊임없이 구체화시키는 김수현의 언어가 시청자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대사는 청각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이기까지 하다.
김수현의 대사에서 빙빙 둘러오는 대사는 거의 없다. 그것이 극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이다.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쉴새없이 내뱉는다. 내면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성격을 표현하고 감동을 일으키는 생명력을 위해 김수현 드라마의 대사는 존재한다. 김수현 드라마의 등장배우들은 내가 이런 성격이다라고 행동하지 않는다. 단지 그의 말속에 이기심과 사랑과 증오가 모두 담겨져 표현된다. 한 때 유행어로까지 번진 「청춘의 덫」의 “부셔버릴꺼야!”라는 대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과 통쾌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살아있는 말이었다. 정확한 의미와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 그리고 쉬지 않고 쏟아내는 대사가 바로 김수현 만의 무기이다. 또한 그녀의 최근작인 「완전한 사랑」에서도 그녀의 직설적이면서도 화려한 대사는 지치지 않은 그녀의 창작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김수현 드라마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소외 받는 계층으로부터 상류층,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까지 골고루 모든 계층의 삶을 다루지만, 드라마의 주류는 역시 대다수 수용자들의 이야기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 즉, 모두가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하려 애쓴다. 이는 시청자들에게 공감과 리얼리즘을 살리는 동시에 자신보다 상위계층인 사람들을 위해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인류는 언제나 이야기에 갈망한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김수현은 우리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와 함께 내가 하지 못할 말을 속 시원히 내뱉어 주는 대변자의 역할도 하고 있다. 김수현 드라마의 시청자 중 유독 중년 여성층이 많은 것만 봐도 얼마나 큰 공감대 형성과 욕구분출, 해소 됐는지 알 수 있다.
그녀의 작품들이 처음에 나올 때마다 ‘김수현의 시대는 갔다’라는 말과 함께 시작되지만 끝에는 ‘역시 김수현이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은 다 그녀의 노력과 작품의 질, 시청자의 호응 3박자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이슈와 논쟁거리가 생겨날 정도로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 작가로서의 위치는 대단하다. 지금껏 그녀가 드라마를 통해 보여줬던 많은 이야기가 다 마르지 않았길 바라며, 가정을 넘어 이 시대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작품이 나오길 기원하다.
이상지<대중문화예술대학원·공연예술학과·석사과정5>
이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