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나무 - 문밖, 마을사람들의 쉼터

수양산 그늘이 천리를 가듯 정자나무 그늘이 마을 사람들을 감쌌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마을의 경조사 소식은
모두 이곳에서 알 수 있다.

저기 돌쇠가 밭갈러 가는구먼
부지런도 해라
신랑감으로는 아주 튼실허지
정자나무에 앉아 있으면 마을이 보였다



“워~어 워~이’김 씨 네 둘째 아들이 소를 몰고 나간다. 햇살이 뜨겁게 비추기 전에 일을 끝낼 요량으로 새벽 이슬을 털며 벌써 집을 나선다. 아내는 그런 남편의 뒷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밭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미 동네사람들 대부분이 밭으로, 논으로 나와 있다. 젊은 사람들 몇몇은 아직 잠이 덜 깬 모습도 보이지만 어르신들은 나이를 잊으신 것인지 활기차게 아침 일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집집마다 나오면서 인사를 하고 학교 가는 길에는 밭에, 논에 있는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하느라 바쁘다. 녀석들 참 예쁘다. 하나같이 인사성이 밝다며 모두들 칭찬을 한다. 늦잠 자서 엄마한테 혼난 아이들도 입은 나왔지만, 인사는 잘한다.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설거지하고, 청소까지 마친 아내들은 또 손놀림이 빨라진다. 새벽같이 나간 남편이 해가 중천에 뜬 지금쯤이면 배가 고플 게다. ‘오늘 새참은 뭘로 내가지?’ 잠시 간의 고민이 시작된다. 그러고는 부엌에 가서는 익숙한 솜씨로 김치전을 해낸다. 김치전을 바구니에 담고, 밥도 두어 그릇 챙기고 절대 빠질 수 없는 먹걸리 한통을 챙긴 다음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선다. 받아 논 막걸리가 없으면 가는 길에 양조장에 들려 막걸리 한되를 받아 주전자에 채워 넣는다. 아슬아슬 재주 부리는 걸 보는 것 같다. 한 손은 머리에 인 바구니 잡고 있고, 한 손에는 막걸리가 들려있고……. 어떤 길을 가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새참 바구니 이는 것도 흘러간 세월만큼 균형을 잘 잡는다. 새참이 도착하면 모두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오늘 하는 일에 대해 얘기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농사일에 손을 대지 못할 만큼 늙어버린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뿌듯하다. 내 평생 해온 일이지만 농사짓고 살겠다는 젊은이들이 기특하다. 새벽잠이 없어져 아들이 농사일을 하러 나갈 때에 눈이 떠졌었지만 괜히 방해가 될까봐 밭에는 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한나절을 보낸 할아버지는 저 하늘에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오후가 되면 누구랑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문 밖으로 향한다. 찬찬히 걸어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느티나무 밑이다. 가장 먼저 온 줄 알았는데 박 영감이 벌써 와서 제일 그늘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저 자리 맡으려고 빨리 나왔는데 얄미운 박 영감!’그것도 모르는 박 영감은 말벗이 온 게 반갑기만 하다. “우리 장기 한판 두세.”박 영감이 제안을 한다. 불 꽃 튀는 접전이 벌어진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두는 장기지만 자리를 뺏긴 할아버지는 속이 많이 상했나보다.

“장이요”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새참 먹고 조금 일하고 나니 얼굴에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린다. 아들, 며느리는 극구 “아버님, 어머님 들어가세요. 저희들이 마무리 짓고 들어갈게요.”하며 밭에서 밀어낸다. 집에 들어가 씻은 사람들은 잠시 쉴 곳을 찾아 느티나무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씨, 어여 와. 뭐하다가 이제와?”매일매일 보는 얼굴들인데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고단한 농사일을 마친 아저씨들은 막걸리 한잔 씩 나눠 마시며 농사일 얘기를 한다. 아주머니들은 누구네 집 셋째 며느리가 입은 옷이 참 곱더라며 수다 떨기 삼매경에 빠진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한여름 더위도 끄떡없다.
“어이구, 여기들 다 계셨네요.”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밭일을 하던 이장이 보인다. “어르신들 다름이 아니라요, 이번에 윤 씨 어르신 손녀가 결혼을 한대요. 다음 주 일요일 이니까, 가셔서 축하도 해주시고 국수 한 그릇 드시고 오세요.”자기네 집 경사가 난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전한다.
“벌써 손녀가 결혼을 해? 거 세월 참…….” 잠깐 동안의 적막이 스쳐간다. 세월도 무상치, 그 녀석 머리 양 갈래로 따서 묶고 개구리 잡겠다고 오빠들 따라 논둑 뛰어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장 씨 아저씨는 밭갈이가 피곤했나보다. 잠이 들었다. ‘매앰맴’ 느티나무에서 매미소리가 요란하면 한여름이다. 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누워 있으면 바람결에 흐르는 매미소리와 함께 금세 낮잠에 빠진다. 에어컨이 따를 수 없는 시원함이 있다.
느티나무에 얹힌 금기의 전설도 갖가지다. 옛날부터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목신(木神)의 노여움을 사 재앙을 입는다고 하여 그 옆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게 바로 아름다운 나무 모양과 긴 수명을 유지시킨 비결이 됐다. 전설을 만들어 금기를 역작용으로 나타나게 해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지혜로움이다.

또, 봄에 일제히 싹을 틔우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임을 미리 알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위쪽에서 먼저 싹이 트면 풍년이 들고 밑쪽에서 싹이 트면 흉년이 든다고 점쳤다. 지방에 따라서는 느티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사내 아기를 얻는다는 전설이 많아 아낙네들의 소원목이 되기도 했다. 밤에 나무에서 광채가 나면 동리에 행운이 온다는 설도 있다. 밤에 나무에서 우는 소리가 나면 동리에 불행이 온다고 믿어 두려워하기도 했다. 또한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빌었다. 전염병이 유행하면 또 제사를 올려 병마와 액운을 물리쳤다는 전설도 있다.
온통 파란색이다. 누가 파란 물감으로 색칠을 해놓았나 보다. 유난히도 하늘이 파랗던 날 시골길을 따라 40분 정도 걸어간 안동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큰 느티나무를 볼 수 있었다. 네번을 움직이며 안아야 다 안을 수 있을 만큼 큰 나무였다. 모든 동네사람들이 나와 마을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을 그곳엔 이젠 가만히 앉아 산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한 분과 빈 막걸리병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몇 번을 외쳐도 듣지 못하신다.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말하자 “내가 귀가 좀 멀었어.”하고 답하신다. 어르신 몇 분만 살고 있는 마을에 찾아간 젊은이가 반가우셨던지, 동네사람들을 모이게 하고는 막걸리를 한 잔 건네신다. 그 막걸리 한 잔 속에는 참 많은 의미가 들어있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나무는 대부분이 느티나무야. 예나 지금이나 여름의 휴식처로 느티나무만한 것이 없어.” 마을 분들의 자랑이 이어진다. 울창한 나무지만 나뭇잎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이 이마에 비춰 부딪친다. ‘빨리’라는 단어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요즘 사람들. 큰 도시 가운데 이 나무를 옮겨 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곳 나이테를 알 수 없는 느티나무의 그늘 아래의 쉼처럼 모두들 한 박자씩 쉬어 가는 건 어떨는지…….
<장민정 기자>stump0826@dankook.ac.kr
<장민정 기자>  stump0826@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