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겸의 <사루비아다방-2>


실제세계에서 이미지는 늘 그 지지체(支持體)와 일체이다. ‘나무’라는 실체는 ‘나무이미지’를 발신(發信)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나무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 즉 영상(映像)만을 기록하는 현대의 정보미디어는 실체와 분리되거나, 실체와는 관련성이 전혀 없는 이미지를 양산하게 되었다. J.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와 같은 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현대는 가공의 이미지들이 부유(浮遊)하면서 대량으로 생산/소비되는 시대인 것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상황을 역설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사진은 지난 겨울 인사동의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렸던 개인전에 발표되었던 작품의 한 컷이다. 테이블 위에 커피잔과 성냥통, 재떨이와 (아마도 설탕이 들어있었을 법한) 용기가 놓여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석고와 같은 흰색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 자체로는 ‘현실’이 탈색되어 버린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 천정으로 부터 비디오프로젝터에 의해 똑같은 구도의 영상이 투사되면, 비로소 커피잔에는 커피가 찰랑거리고 상호가 새겨진 성냥통과 담배꽁초가 버려진 재떨이가 ‘현실’의 광채를 띄우고 관객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하는 두 사람의 팔이 투사되고 계속 포즈를 바꾸며 (아마도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가끔 성냥개비를 가지고 무엇인가 도형을 만들면서 놀고 있다. (70년대의 다방에서 빈둥거려본 적이 있는 40-50대의 장년층이라면 이 장면에 얽힌 기억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 같은 전시에 출품되었던 다른 작품들도 그러하지만, 김창겸의 이 개인전은 60-70년대의 다방문화의 전형으로서, 지금은 전업(轉業)을 위해 내부장식들이 철거되고 콘크리트 구조물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는 ‘인사동 사루비아 다방’의 추억을 현재형으로 되살려낸 이벤트였다.
비디오프로젝터의 영상을 제외하면, 실내는 삭막한 콘크리트와 흰색 테이블에 온통 흰색으로 도배된 듯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영상이 투사되는 곳에서는 3-40년 전의 사건들이 현재형으로 되살아난다. 홍수환의 세계타이틀매치에 열광하는 사람들, ‘축 발전’이라고 쓰여진 큰 거울을 통해 보이는 다방의 레지아가씨들, 그리도 이 작품에서 보듯이 테이블 위에 나타난 손들이 벌이는 성냥개비 장난.... 이 모든 것들이 어쩜 그리도 닮았을까?
실제와 똑같이 생긴 모형 위에 정교하게 투사된 (실제의)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영상이라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만큼 요즘 프로젝터들의 성능이 좋아졌다) 그러나 전원을 내리고 난 후, 남아있는 현장을 보면 비로소 김창겸이 벌인 짓(?)이 무엇이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는 일종의 마술을 펼쳐서 과거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을 잠시 소생시킨 것이다. 그것은 장/노년층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집단기억의 표상으로서 일종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원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