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서울 31.1960년 겨울의 서울과 익명의 군상


1964년 서울, 삶에 대한 진정성이 상실되는 공간
근대화 속에서 의미있는 것들은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가난했던 시절 지친 몸을 이끌고
골목어귀 대포집에서의 한 잔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대포집,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1980년대까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주점이다. 오늘날이야 술 한 잔 걸치려면, 앉은뱅이가 되어 온몸이 달아오를 때까지 마시고 흥에 겨워 이차, 삼차를 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난했던 시절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대포집에서 한 잔 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병(甁)술은 물론이고, 값진 안주도 없이 술 도가니에서 갓 푼 술 한 사발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공간인 대포집에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의 공간이었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등장하는 ‘선술집’의 풍경 또한 대포집과 유사하다. 다만 술안주의 항목과 술 종류가 다소 늘었다고나 할까 ? 처음부터 패를 지어 술을 마시러 가는 것보다는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합석해서 술을 먹어도 자연스러운 곳. 누군가가 한 턱 내듯 술을 거하게 대접하기보다는 서로의 추렴으로 술을 먹으면서 인생사를 말하는 곳. 그러나 선술집에 모여든 사람과의 합석이 자신의 인생에 별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듯이, 선술집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여정의 공간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의 대학원생인 ‘안’, 구청 병사계에 근무하는 ‘나’와 35~6세의 사내는 이 공간에서 우연하게 만나 술을 기울인다. 안면식이 없었던 이들 중 먼저 합석을 했던 ‘안’과 ‘나’는 어떠한 합의점도 찾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대화만 한다. 익명성과 개별성의 공간인 도시에 모여든 이들에게 공동의 정서가 있을까 ?
생득적으로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야만 하는 전통적 공간과 달리 도시는 도시의 구성원에게 소속을 강요하지 않는다. ‘안’과 ‘나’가 나누는 대화는 이러한 도시의 속성에서 비롯함은 자명하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지만, 서울의 경계에 서있는 듯한 모습의 이들에게서 서울에서의 개인과 개인의 연(緣)은 ‘우연’과 ‘거리두기’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 말조차 거짓말로 회의되는 순간에 말은 허사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말의 ‘의미 없음’은 ‘관계 맺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안’과 ‘나’의 합의되지 않는 평행선의 대화는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안’과 ‘나’를 매개하는 술은 서로의 어색함을 깨기 위한 안주일 뿐이다.

이러한 관계의 어색함을 정리하고, 부유하는 자신의 거처를 찾아갈 무렵 이들의 관계 속에 틈입한 아내를 잃은 사내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예외적인 존재이다. 그는 병으로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상태에서 ‘안’과 ‘나’가 마시는 술좌석에 합류한다. ‘안’과 ‘나’가 무의미한 대화를 마치고 자신들의 대화에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야말로 의미 없음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의미 있는 존재로 틈입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저 ‘꿈틀거림’이 아닌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내의 행동에 이들은 적지 않게 당황한다. 그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의 삶이란 욕망이 부추기는 대로 행동하는 곳이었는데,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사내의 도시적 삶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하는 독백적 토로는 개인의 아픔을 공동의 아픔으로 전화하지 못하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절규다.
근대적인 도시의 존재들은 타인의 삶에 대하여 적당한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보호한다.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척 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영역이 보호되는 공간에서 관음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엿보기의 심리상 타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는 원천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는 심리도 상호소통적인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독백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며, 청자는 주변의 소음처럼 화자의 소리를 듣는다. 의미 없음의 공간에 의미를 세우려는 움직임은 비극적인 종말만을 노정할 뿐이다.
‘나’와 ‘안’, 그리고 아내를 잃고 죽음을 선택한 ‘사내’는 본격적인 근대 산업도시로 자리매김하는 서울에 모여 있는 도시 군상들의 단면이다. 근대적인 산업도시는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들에 반비례하여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한 진정성이 상실되는 공간이다. 1960년대 본격적인 공업화에 시동을 걸고 향촌으로부터 이탈한 인구들이 유입되던 서울에서 삶은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나’처럼 아침 만원버스를 헐떡이며 올라타서 젊은 여인의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것에서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나, ‘안’처럼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이들이 생동성을 발현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공간에 갑자기 아내의 죽음에 진정성을 부여하며 실존적 자아를 부정하며 나타난 사내는 이질적이다. 죽은 아내의 친정을 알 수 없어서 병원에 해부용으로 시체를 팔았다고 주장하던 사내는 도시의 문명을 상징하는 건물의 화재 현장에서 아내의 시체를 팔고 받은 돈을 불 속으로 던진다. 그는 도시를 환하게 비추던 외현들도 불구덩이 속으로 던진 돈과 함께 타버리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1964년 겨울의 서울은 익명의 존재들이 서로 스치듯 조우하던 공간이었다. 그들의 관계에서 진정성을 논한다는 것은 서울에 정주했거나, 정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낯선 풍경이었다. 급속한 근대화 속에서 의미 있는 것들은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대체한 것은 순간의 찰나(刹那)만이다.


▲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인사동의 선술집.
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