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언(寓言) 읽기의 즐거움26- 벙어리저금통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인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아기설(啞器說)>이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벙어리저금통에 대한 것인데,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문제삼은 우언이다.
정사년(1737) 가을에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시장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평평하며 속은 텅 비었는데, 이마에는 일자(一字) 모양으로 가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내가 종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이지?”
“벙어리입니다.”
내가 그 말을 알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이냐?”
“벙어리입니다.”
나는 그가 농하는 줄 알고 화가 나서 꾸짖었다.
“내가 이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벙어리라고만 대답을 하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
“소인이 감히 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물건의 이름이 벙어리이기 때문에 벙어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물건은 입이 있으나 말을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름을 ‘벙어리’라고 붙였습니다. 민가의 어린 계집아이들이 이것을 사다가 동전이 생기면 그 속에 넣는데, 가득 차면 이것을 부수어 동전을 꺼냅니다. 아마 동전을 헤프게 쓰지 않으려는 것일 겝니다.”
“아, 무릇 입을 가지고도 말을 못하는 것이 어찌 이 물건뿐이겠는가. 병, 동이, 단지, 항아리도 어찌 입이 없겠는가마는 이런 그릇들이 말을 못한다 하여 ‘벙어리’라고 부른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곁에 있던 여관 주인이 나의 말을 듣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는 모르시오? 이는 사람이 붙인 이름이 아니고 조물주의 희극입니다. 조물주는, 사람에게 말소리와 웃는 얼굴은 보이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입을 통해 동요를 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물건을 꾸며 각종 그릇들을 만들기도 하니, 이것은 모두가 사람들로 하여금 듣고 보아서 깨닫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물건이 나온 지 10년이 채 못되었는데, 그것이 가진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음을 비웃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아야 함을 경계한 것입니다. 무엇을 비웃는다는 것인가. 말을 해야 마땅한데도 말하지 않는 사람을 비웃는 것이니, 벙어리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경계한다는 것인가.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도 말을 해서 화를 자초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니, 이 때는 벙어리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말이란 우호를 맺게도 하고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중략)… 이제 만일 그 ‘비웃음’을 알아서 반성한다면 장차 조정의 명신이 될 것이며, 그 ‘경계함’을 알아서 반성한다면 반드시 처세에 능통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그 이야기를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물었으나, 주인은 입을 가리키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물러나와 이것을 기록하여 스스로 명심하고, 아울러 집권자에게 올리고자 한다.
‘벙어리저금통’이라는 이름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 벙어리 같다고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과 마땅히 해서는 안될 말을 하여 화를 자초하는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는 그처럼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분간하지 못하여 비웃음을 사고 화를 자초하는 벼슬아치들이 많으니, 신하가 제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그 결과 임금이 성군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안정복은 「아기설」에 이어 「파아기설(破啞器說)」을 짓기도 했다. 벙어리저금통을 부수어 버린 이야기인데, 벙어리저금통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도나도 ‘말조심’을 하게 되자, 아예 말을 하지 않아 마땅히 해야 할 말조차 이제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윤승준<교양·강의전담> 초빙교수
윤승준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