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이성이 조화로운 젊은 세대 되자

현 기 영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요즘 우리 사회는 과거사 청산 문제를 놓고 가타부타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일부 대학생들이 보이는 태도는 실망스럽게도 매우 냉담하다. 기성세대를 향한 그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당신들이 오죽 못났으면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친일 문제 하나 해결 못한 채 지금도 그 타령이냐고 비웃고 있다. 마땅히 역사의식이 담긴 분노의 목소리여야 할 젊은 지성이 그게 마치 남의 일이기나 한 듯이 무관심과 냉소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친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은 친일분자들과 그 상속자들이 역대 독재정권의 핵심 세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인데도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사실을 별로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요컨대 그들의 선배인 ‘386’세대에게 절체절명의 화두였던‘역사’, ‘민족’, ‘공동체’에 별 관심이 없다. 소비향락 문화의 압도적 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는 그러한 화두들이 넌센스처럼 들린다.
한국사회는 지난 십수 년 동안에 역사상 유례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는데, 향락적 상품소비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초고속으로 조성된 새로운 풍속, 초고속 질주는 자연히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을 가져왔다. 과거란 오직 남루한 것, 후진 것, 쓸모없는 것, 써버린 것, 죽은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게 되었다. 부모 세대는 무시해도 좋은 과거의 상징으로 치부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역사는 물론 자신의 과거도 망각해 버린 채 소비향락 문화의 눈먼 소비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머리속이 소비향락의 온갖 저질 잡동사니 정보로 가득하다 보니, 온당한 역사의식이 자리 잡을 여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놀랄 일은 그들이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릇된 진보관에 사로잡힌 그들은 언제나 새 것만을 추구한다. “낡은 훌륭한 것보다 새로운 저질이 좋다”라고 서슴없이 그들은 말한다. 요즘 세태의 특징 중의 하나가 성개방 풍조인데, 프리섹스도 새로운 경험, 새로운 감각이므로 진보적 사상, 진보적 행동, 진보적 문화라는 식이다. 물론 억압된 성의 해방은 어떤 면에서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성해방이 방종으로 흐른 나머지 메마른 성행위, 사랑의 진실이 없는 피스톤 운동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성과 감성의 관계에서 감성의 우위를 주장한다. 오랫동안 감성은 이성에 의해 억눌려 왔는데, 이제 이성의 독재에서 감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어느 수준에서는 옳은 말이다. 대학사회에서 ‘역사’, ‘민족’, ‘공동체’가 강조되던 지난 80년대는 이성의 시대로서 어떤 면에서 ‘이성의 독재’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래서 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점차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되자 그 동안 이성에 억눌려 있던 감성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해방된 감성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성을 동반하지 않는 감성은 결국 감각 위주의 퇴폐로 귀착하고 있지 않는가. 순수한 감성의 해방은 실종되고 말초감각의 욕망만이 불거져 나오고 있지 않는가. 감각의 대량소비, 노래·춤·섹스의 현란한 상품들이 거리마다 넘쳐난다. 정상적 수요를 열 배, 스무 배 능가해버린 이 감각의 대량소비·과소비·감각의 무정부 상태는 소비자 해방이 아닌 중독의 함정으로 밀어 넣고 있다.
그러므로 감성과 이성이 톱니처럼 조화롭게 맞물려 있는 인간, 때로는 타락할 수도 있지만 이성의 복원력을 잃지 않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향락적 개인을 내세우면서, 역사·민족·공동체를 편견·시대착오·오류라고 강변하는, 한없이 미국식으로 ‘세련’된 지식인들이여, 당신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식민지가 아니고 공동체임을 명심하라.
한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