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의 후덕(厚德)한 인심은 곳간에서 나왔다
집안의 소중한 살림살이를 보관하던 곳, ‘곳간에서 인심난다’

곳간에는 쌀가마와
아낙의 손 때가 묻은
가재도구, 농기구가
보관되어 있다

곳간을 여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아낙의 마음과
이웃에 대한 아낙의 정이다

옛날, 집 한 켠에 자리하고 있던 곳간은 아낙의 마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곳간 안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과 나누는 아낙네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낙은 부엌일을 하다말고 손에 물을 털고 나와 나무문을 가로질러 놓은 빗장을 풀어 곳간 문을 열었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쌀가마와 가재 도구, 다음 해를 위해 휴식을 취하는 농기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고, 벽에는 짚으로 엮은 마늘과 꼬챙이에 꽂혀 대롱대롱 매달린 감이 걸려있다. 빛 한줄기 제대로 들지 않는 이 곳에 이 집의 재산이 들어있다.
무더운 여름 가뭄을 겪고, 홍수를 넘겨 가을에 수확한 곡식들을 가마니와 섬에 담아 곳간에 차곡차곡 들여놓았다. 그리 크지 않은 곳간이지만 쌀가마가 채워지니 올 겨울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마음도, 배도 든든하다. 곡식들이 채우고 남은 자리에는 곡식을 수확할 때 쓰던 기구들이 자리를 채운다. 벼를 찧던 절구, 곡식을 담아 까불려 쭉정이를 골라내던 키가 벽에 줄을 맞춰 걸었다. 이렇게 곳간을 정리해 놓은 아낙은 끼니 때 마다 바가지 가득 쌀을 퍼가면서 곳간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다.

곳간은 아낙의 것이며 아낙의 보물 창고이다. 식구들을 먹일 식량이 곳간에 있으며 그 식량을 수확하고 만드는 도구들, 재산이 곳간에 있다. 이 보물 창고를 지키는 곳간 열쇠는 아낙의 모든 것이다. 아낙은 곳간을 자물쇠로 채워놓는 것도 모자라 단단한 보초를 두었다. 자물쇠에 새겨진 물고기이다. 이 물고기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곳간을 지켜줄 것이다. 아낙의 두 손에 꼭 쥐어진 곳간 열쇠는 그의 시어머니의 것이며 시어머니는 또 그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곳간 열쇠를 가진 자가 그 집의 실질적인 실력자이다. 그러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물려주는 것은 세대교체를 의미한다.
곳간이 모든 아낙에게 하나씩 주어져있던 것은 아니다. 초가 삼간, 이곳에 사는 아낙에게는 곳간은 커녕, 밥 한끼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하루 한끼를 해결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초가 삼간의 아낙은 곳간을 지을 형편도 되지 못했지만, 곳간이 있다하더라도 곳간을 채울 곡식이 없었다. 그저 넓은 곳간 가득 곡식을 채워놓고 따뜻한 방에서 배를 두드리는 마을 부자가 야속할 뿐이었다. 옛 속담에 ‘광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마을 부자는 이런 속담 따위는 모르는 모양이다. 아낙은 같은 서민이지만 작은 곳간을 가지고 있는 옆집 안동댁이 부럽다.

안동댁의 작은 곳간에는 쌀 세 섬이 있고 벽에 걸어둔 새끼로 엮은 푸른 무청이 잘 말라가고 있다. 그 옆에는 아낙의 손때가 묻은 대나무 광주리와 체가 걸려있고 남은 벽면은 곶감이 될 준비를 한 감이 매달려있다. 먹을 것이 가득한 곳간은 이 집 남매의 숨바꼭질 장소이기도하다. 남매 중 어느 하나는 꼭 이 곳간에 와서 숨는다. 커다란 쌀가마가 몸을 잘 숨겨주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곶감이 얼마만큼 익었나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항상 조심스레 곳간에 들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저기에 어떤 보물이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숨바꼭질을 핑계로 곳간에 들어온 남매는 구석구석을 살피지만 그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은 곶감 하나 뿐이다. 까치발을 딛고 팔을 뻗어 매달린 곶감을 만져본 어린 남매는 이 곳간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깨닫지 못한 채 놀이를 마친다. 저녁을 짓던 안동댁은 체를 가지러 곳간으로 갔다. 벽에 걸린 체를 손으로 잡으며 남은 곡식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그리고는 곳간에서 나와 힘을 주어 곳간 문을 걸어 잠근다. 그 때 대문 앞에 누군가가 동냥을 왔다. 안동댁의 곳간은 넉넉하지 않지만 인심이 있었다. 이렇게 굳게 걸어 잠근 곳간 문을 동냥하러 온 이들을 위해 열고, 그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아낙에게는 정이 있었고 이웃이 소중했다.

굳게 잠긴 곳간 문을 여는 것은 두 가지 힘이다. 하나는 아낙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아낙의 이웃에 대한 정이다. 이 두 가지로 곳간 문이 열리고 아낙이 소중히 간직했던 보물이 세상 밖으로 나와 빛을 맞는다. ‘곳간에 쌓아두기만 하면 무엇 하느냐, 있으면 필요한 이에게 나눠야 한다’는 것이 아낙의 생각이다.
참판댁 곳간은 크기부터 다르다. 가난한 아낙이 살던 초가 삼간의 크기가 이 집 곳간만 하다. 이러한 곳간 옆쪽에 헛간이라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곳간이 곡물, 농기구, 생활용구들을 보관하는 공간이었다면 헛간은 저장공간이지만 규모도 더 작고, 외양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집 헛간에는 농기구들이 즐비하고 그 큰 곳간에는 누런 짚으로 엮은 불룩한 쌀가마가 가득하다. 하인들에게 부엌 살림을 맡기다시피 하는 아낙이지만 곳간만큼은 철저하게 아낙이 관리한다.
크기가 크든, 작든 재산이 보관되어 있는 곳간을 아낙들은 항상 철저히 관리했다. 곳간에는 가족들이 일한 결실과 그 아낙의 재산 즉, 가족들의 재산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곳간은 재산을 지키는데 특별한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집을 지을 때 서늘한 곳 한 부분에 나무를 기둥으로 흙으로 벽을 만들고, 나무로 문을 만들고 자물쇠 하나를 걸어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여름에는 음식을 시원하게 보관해주고, 겨울에는 얼지 않게 해준다. 그래서 곳간은 아낙의 근심을 해결해 주었다. 1년 내 먹어야하는 곡식을 쥐가 상하게 하지 않을까, 김치가 얼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들을…….

가을, 추수를 끝내고 나서 여러 곡식들로 차 있는 곳간을 보며 아낙은 만족해했지만 흉년이라도 들면 아낙은 걱정이 태산같다. 그 집 곳간이 가득 찼느냐 안 찼느냐는 동냥하러 다니는 이들의 밥줄도 달려있다. 곳간 하나에 여러 사람이 울고 웃는다.
그 사람들을 위해 아낙에게 곳간은 지켜야 할 장소였고, 곳간 열쇠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었다. 아낙이 곳간을 소중히 여겼지만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곳간을 열고 나눌 줄도 알았다. 아낙이 소중히 여긴 것은 가족들을 위한 재산이기도 했지만 정도 소중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곳간은 그늘진 곳에 있었지만 항상 온기가 있었다.
아낙의 정이 있고 소중히 아끼는 그 마음이 담겨 있는 곳간. 오늘 찾아간 그 곳간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아있는 곳간의 모습은 본래의 것과 달랐다. 빗장이 필요없는 듯 곳간 문은 한없이 열려 있고 초겨울 찬바람만이 텅 빈곳간을 채우고 있었다. 오늘날, 아낙의 보물과 정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빈곳간처럼 오늘날 아낙의 마음의 곳간도 비어있는 것은 아닐까? 곳간을 찾아 온 이곳에서 느끼는 겨울 바람이 더 아리기만 하다.
<황영아 기자>  baby222@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