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노동의 새벽

살인적 노동조건에 대한 고발

간접체험이란 것이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체 경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더 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더 커질 때 일 것이다. 과거, 현재를 떠나서 기교적으로나 미학적으로의 의미가 더 부여되는 글은 그 시대상을 가지지만 현재에서도 투영되는 양분성을 모두 가진 것이 최고의 글이 될 것이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책이 한 권 있다. 내 나이 6살 세상에 출산된 한 권의 책은 시대의 혼란과 차별을 얘기하며 뜨겁게 불사르고 또 어느새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행방불명은 더 많은 사람의 의구심을 가지게 했으며, 그 역경의 출산을 이뤄낸 작가 역시 시대 속의 희생자가 되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중략)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 처진 육신에 /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중략)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의 시 구절이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독 품은 칼 한 자루를 마음속에 담고 당대 어느 시인의 목소리보다 울림을 지닌 이 시들이 그 당시 문학을 공부하며, 속히 말하던 지식인의 대열인 대학생들이 더 속된 표현의 공돌이의 글을 읽어 내며 그들의 생활을 동요하게 만들었던 문제의 시이다.
노동자인 시인이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노동 현장의 분노와 사랑을, 절망과 희망의 숨결을 실감 있게 노래하고 있다. 가난의 멍에와 질긴 목숨 때문에 전쟁 같은 노동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처지가 비관적인 어조로 토로되고 있다. 죽지 않기 위해 하는 노동이 너무도 힘겹고 고되기 때문에 죽음이 연상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은 이 절망의 벽을 깨뜨릴 반역의 꿈을 키운다.
한 기자는 그의 글을 ‘고단한 삶과 영혼의 절규를 직접적이고 살아있는 일상어로 생생하게 그려내 큰 감흥과 용기를 북돋웠다’라고 표현했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특히 나처럼 육체적 노동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80년대의 경제 부흥기의 밑바탕이 됐던 노동자의 외침은 어쩌면 시대상을 무시하는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며, 순수하게 그 시의 의미를 퇴색된 상태로 읽혀지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20살 공순이의 노래’라는 ‘노동의 새벽 20주년’헌정 공연의 의미는 간접체험의 현 시대에 또 다른 모습이라 생각된다. 시가 시로 읽히는 무던함이 20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 더 대중적이며 쉽게 다가오는 음악으로의 재창출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시 본래의 의미를 얼마나 비워낼까 하는 의문은 조금은 과장되게 그 음악을 풀어내는 뮤지션으로 믿어 봄이 옳을 것 같다.
아래의 글은 국민일보에 실린 내용이다. 어쩌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이 사실을 우리 사회에 환기시킨 것은 한 장의 음반 발매 소식이다.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헌정앨범. 음악평론가 강헌은 “그 피맺힌 몸부림과 절규가 이제는 외면하고 싶은 기호가 되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이 시집이 우리의 근대 속에 새겨놓은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며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선과 감각을 보존되고 계승되어야 한다는 작은 믿음에 의해서”라고 헌정의 의미를 설명했다. 가장 주목되는 곡은 마지막 트랙에 실린 ‘겨울새를 본다’가 아닐 수 없다. 박노해가 올해 새로 쓴 시에 한대수가 곡을 붙여 노래했기 때문이다. ‘고맙다 이 거품 흐르는 강물 위에 시린 발 저으며 찾아온 그대’라는 대목이 반복되는 이 노래는, 외국인 노동자 밴드 ‘스탑크랙다운’이 부른 곡 ‘손무덤’과 함께 1980년대 한국 노동자에게 강제됐던 살인적 노동조건이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노동자이다.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넥타이 부대도, 망치를 들고 현장에 있는 사람도 모두 노동자이다. 내 모습의 투영된 노래한 곡은 소주 한 잔 만큼 날 위안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새벽 노래를 부른다 / 그 아픔, 그 슬픔, 그 분노 / 이젠 남의 가슴에 떠넘길 거냐고 / 가슴도 아닌 가슴으로 살 거냐고 / 스무 살의 나를 향해 / 스무 살의 너를 향해....
김명범 <대중문화예술대학원·공연예술학과·석사과정 4>

▲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공연 ‘20살 공순이의 노래’ 포스터
김명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