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을의 정치는 술맛으로 보고 한 집의 일은 양념맛으로 본다’
집집마다 가양주 익어가는 날 벗들이 찾아오네

‘술이 있으면 벗이 없고 벗이 없으면 술이 없더니. 오늘은 무슨 날로 술이 있자 벗이 왔네. 무어라 이난 병이니 종일 취하리라.’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술을 벗 삼아 근심과 시름을 잊었고 농사일의 고단함을 달랬다. 혼인할 때 맑고 깨끗한 술을 빚어 부부가 나누어 마시며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약속했고, 잔치 때마다 술잔을 돌리며 기쁨을 나누었다. 농경을 기반으로 한 우리 민족은 고된 노동의 피로를 걸쭉하고 시원한 막걸리로 달래곤 했다. 또 명절이나 제사에 집안의 안녕을 빌며 정성스레 빚은 술을 조상께 따뜻하게 담아 올리는 것이 예의 시작이었다.

우리나라 술은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술이 상업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고 곡식으로 만든 귀한 술을 특수 계층이 아닌 서민들도 먹을 수 있게 대충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유명한 토속주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서민들도 각 가정에서 그 집안을 대표하는 술을 담가 마셨는데 이것을 ‘가양주(家釀酒)’라고 한다. ‘지봉유설’에서 이광수는 ‘옛말에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의 일은 양념맛에서 본다’라고 했다.
그러나 구한말, 일제가 주세 제도를 강요하면서 각 가정에서 술을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고 거의 모든 지역 가양주의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요즘에 와서야 가양주의 귀중함을 깨달아 제조법을 아는 장인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가양주 개발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주를 만드는 방법은 곡식을 물에 잘 불려 물을 뺀 뒤 적당하게 찌고, 찐 곡식과 누룩을 술독에 담아 숙성시킨다. 이때 술독 안에 용수라는 길쭉한 바구니를 넣는데 그 안으로 들어온 깨끗한 술이 청주이고 곡식과 섞인 나머지 술을 거른 것이 막걸리이다. 여기서 거른 청주를 소줏고리에 붓고 고아 그 증기를 모은 것이 전통 소주이다.
이런 제조법과 재료는 다양하게 변형된다.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주변 환경과 고유의 식생활이다. 우리나라의 술은 외국의 과실주와는 달리 쌀이나 맵쌀을 주재료로 삼는 곡주이다. 또 마시는 때와 빚는 시기에 따라 귀밝이술, 삼해주, 삼오주, 사오주, 청명주, 신도주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식히는 기간에 따라 술의 이름이 달라지기도 해 일야주, 삼일주, 칠일주, 십일주, 스무주, 백일주, 일년주, 천일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름은 달라도 그 재료는 한결같이 곡식이다. 곡주가 우리 체질에 맞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의 기호나 식습관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이미 곡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처럼 발효음식과 같은 복잡하고 다양한 맛을 추구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곡주는 가장 과학적이고 다양하며, 무엇보다 우리 체질에 가장 잘 맞는 음식이다.
전통주에는 계절감과 풍류가 깃들어 있다. 술을 빚을 때 여러 가지 향이 다른 자연 재료를 넣어 만든 가향주를 즐겨 마셨다. 봄이면 삼천리 강산을 물들이는 진달래를 따다 술을 담가 마시며 봄이 왔음을 느끼고 배꽃이 필 무렵 빚어두었던 이화주(梨花酒)를 마시며 한여름 갈증을 씻었다. 탐스러운 과일로 과일주를 담아 마시고 서리를 이겨낸 국화 향기 그윽한 국화주가 가을이 깊어감을 노래했다. 또 하얀 눈이 덮인 산을 바라보며 동짓달 매화주를 마시던 긴긴 밤의 그윽함을 사랑했다.
전통주가 뛰어난 것은 다양한 종류와 맛, 약주로서의 효능보다 더 값진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술을 빚는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맛이다. 술을 빚는 사람에 따라 그 맛과 향, 마실 때의 느낌이 달라진다고 하면 의아해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술 빚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전통주의 가장 중요한 재료이다. 성급한 사람이 술을 빚으면 그 맛이 독하고 박하다. 또 느긋한 사람이 술을 빚으면 술이 부드럽고 향기롭지만 술이 싱거워진다. 모든 음식을 만들 때도 그러하듯 마실 사람을 생각하며 차분하고 야무지게 빚은 술은 먹는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아 준다. 술은 기다려야 맛이 든다. 충분히 쌀을 불리고 천천히 물을 빼주어야 한다. 또 맛있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누룩이 있야 한다.

누룩은 되도록 오랜 시간 발표하고 숙성시켜야 술이 잘된다. 술은 청결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술맛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술은 미생물과 균으로 그 맛이 생기는데 여기에 잡균이 들어가면 술의 맛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술은 잘 보관해야 한다. 술이 가장 잘 익을 수 있는 온도와 발효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아이를 돌보듯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것이 술의 숙성이다. 술을 빚을 때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를 말하는 ‘육재(六材)’ 중에 하나가 빚는 이의 마음자세이다. 술 빚는 사람의 마음자세가 바르지 못한데서, 제대로 맛이 날 리 없고 설사 술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취흥을 얻을 수 있을까 싶다. 술은 빚는 사람의 정성을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계영배(戒盈杯)’라는 전설의 잔이 있었다. 이 잔은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으로 잔에 술이 일정량이 넘으면 잔 아래 작은 주전자로 흘러가도록 되어있어 아무리 따라도 가득 차지 않게 만들어 놓은 잔이다. 술이 과하면 건강을 해치고 남에게 실수를 하므로 넘치는 것을 경계하고 모자람의 미덕을 가르치는 술잔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잘 마시는 것’이라는 요즘 사람들의 음주 문화를 부끄럽게 하는 선조의 지혜이다. 단풍이 아름답게 지는 가을. 정성스럽게 빚은 곱디 고운 빛깔, 그윽한 향의 가양주를 계영배에 따라 마시는 풍류. 신선 놀음이 따로 없는 음주의 기쁨일 것이다.

▲ 소줏고리에 청주를 넣고 고면 맑은 소주가 된다.

▲ 전통주는 숙성에서 그 맛이 든다.
<조영리 기자>  diadiadl18@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