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폐된 고독한 섬, 남대문 일제에 의해 양 날개를 잃고 도로 한가운데 창백하게 서 있다


생존을 위해 부끄러움을 내던져야 하는
서울의 사람들은 남대문과 닮았다

일제에 의하여 한양의 성곽이 철거되기 전,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숭례문의 모습은 거대한 암벽처럼 우람하다. 그런데 오늘날 숭례문은 문루의 어깨에서 뻗어 나간 양 날개를 잃고 도로 한 가운데 창백하게 서 있다. 도성을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루는 고층건물의 앞에 놓여져 있는 조각 장식처럼 왜소하다. 문루는 힘을 뽐낼 수 있던 어깨를 잃으면서 메트로폴리스에 정주하는 이들의 방향 감각을 도와주는 이정표로 전락한다.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신동아」, 1974. 8)에서 등장하는 ‘남대문’으로 상징되는 서울은 더 이상 건축물 고유의 아우라가 상실된 곳이다. 간난(艱難)의 피난길에서 본 ‘남대문’의 아우라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 ‘남대문’은 수묵화의 경건함으로 우뚝하니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휘번드르르한 치장 뒤에 감춰진’ 것이자, 늘 그곳을 지나치면서도 존재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도시 구조물의 하나일 뿐이다. 외양을 중시하는 근대화가 그렇듯이 이미 충분하게 낡은 것임을 증명한 남대문은 다른 낡은 유물들의 경로처럼 있어도 있지 않은 것이 된다.
일제에 의하여 늠름한 어깨가 잘려 나가고 경성역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놓여지면서 이미 남대문은 국가와 수도의 상징적 권위를 잃었지만, 그래도 주위의 건축물들이 남대문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가 고통스러운 피난길에서 본 남대문은 주변을 압도하는 웅장함과 비장함을 지닌 미적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그것은 20여년의 객지생활에도 자신이 성장한 서울을 연상하게 하는 강력한 상징이다.
그런데 ‘나’는 서울 사람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의 요소 중 하나로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급증하는 것을 말한다면, ‘나’는 다소 예외적인 존재이다. 서울에서 나서 지방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회귀하는 경우는 ‘무작정 상경’으로 상징되는 1970년대 한국의 풍경에서 다소 낯설다. ‘나’는 한국현대사의 사회변동으로 자신의 정주지를 옮겨야 했던 이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성장했던 ‘나’는 전쟁으로 인하여 지방에서 거주하고, 결혼생활 또한 지방에서 이뤄졌다. 그런 ‘나’가 다시 서울로 오게 된 것은 한 몫을 잡으려는 세 번째 남편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 온 수줍을 심하게 타던 이전의 ‘나’가 아니듯이, 서울 또한 이전의 서울이 아니다. 남대문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 변화하는 것은 ‘나’와 ‘외부’의 조응에 의한 것이다. 군사정부의 일사분란함 속에서 외형적으로 한국자본주의는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었고, 서울의 가로 또한 ‘남대문’보다 더 큰 규모의 건물들이 정좌하면서 ‘남대문’은 한 시대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에서 유폐되어 고독한 섬이 된다. ‘남대문’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듯이,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지 못하는 이들 또한 유폐된다.
이윤추구가 지고지순의 가치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인간의 행위는 얼마나 진정성을 지니고 있을까? 짐짓 성인인 척하는 두 번째 남편에게 질렸던 ‘나’가 세 번째 남편에게서 안위를 느끼는 것은 그가 위장의 몸짓을 배제하고 드러내놓기 때문이다. 즉 그는 돈을 버는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을 가장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시대적 정신을 투철하게 실현하고 있는 그와 살면서 ‘나’또한 그의 생활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나’는 자주 ‘우두망찰(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경험한다. ‘나’는 속도와 포즈의 도시적 삶을 근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준비도 없거니와 할 필요성 또한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편의 삶에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혹은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기 위하여 ‘나’ 도시의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삶은 근대화의 역군이 될 예비인력을 양성하는 종로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더 많은 외화를 벌기 위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일본관광객들을 조우하는 순간, 나는 정체성에 대하여 고통스러운 자각을 하게 된다. 예비 ‘조국근대화의 기수(1970년대 유신정권의 상징적인 표어)’들 아래에 호출된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그들은 학교 이외에도 학원 등에서 자신을 겹겹이 싸는 많은 것들을 배우지만, 정작 자신의 속 알맹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찰의 과정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 일본인 관광객 앞에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지는 서울에서 ‘나’는 남편이 추구하는 ‘일본기업과 기술 제휴한 전자회사’나, 종로의 학원가에서 열심히 학습을 하는 이들 모두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허울에 휩쓸린 이들로 인식된다.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외형적인 가장의 몸짓에 길들여진 인간들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근대화의 방향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 왔다’, ‘거칠게 살아 왔다’라는 말들이 낭만적인 회고적 언사로 자주 애송되는 시점에서, 과연 이것이 진정성을 보장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지만, 허영이 아닌 생존을 위하여 부끄러움까지도 내던져야만 하는 이들의 삶은 인간적 희망을 지닌 삶이었을까 ?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한때 우리 조상들은 남대문에 앉아 담소를 나누곤 했다.
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