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 사라지는 한국 문화

유랑극단-‘구경’의 문화

웃음과 눈물로 서민들의 한(恨)을 풀어주었다
재주꾼과 매호씨 사이에 오가는 재담에 서민들의 삶을 담았다

“하룻밤을 신명나게
놀고 나면 웃음과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얼굴은
다시 일상이 돌아온다”

장단에 맞춰 줄을 타는 어름놀이를 보며 노인은 말했다.
“줄타기는 우리네의 삶을 닮았구먼.”

어제까지만 해도 봄기운이 느껴졌는데 또다시 눈이 내렸다. 길에는 벌써 눈이 덮여 있고 눈발이 앞을 가린다. 동춘 예술단이 공연을 한다는데……. 어제 오후, 노랗고 빨간 화려한 색으로 치장한 트럭이 마을을 오가며 공연을 홍보했었다. 오래 전, 어린 나이에 보았던 유랑극단을 회상하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아직 공연시간이 한참이나 남아 공연장 앞에서 컵라면, 솜사탕을 팔려고 모여든 장사치들밖엔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자 두 내외가 손을 꼭 잡고, 또는 자식의 차를 타고 추억을 회상하며 노인들이 모여들었다.
“김 영감도 왔구먼.”
마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듯 여기저기 아는 사람도 많다. 마치 유랑극단이 온다던 옛 장에 온 것처럼…….

장이 열렸다.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옹기장이가 자리를 잡고 가축장과 나무짐도 한 자리를 차치하고 앉았다. 서로들 내 물건 사가라고 외치는 모습이 평소 때와 같지만 물건을 파는 이들과 사러 온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오늘 있을 유랑 예인들의 공연이다.
“모든 걸 잊고 신명나게 놀 수 있겠구만…….”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곧 장 안에 꽹과리 소리가 울리고 그 뒤를 동네 조무래기들이 따라붙었다. 신이 난 건 아직 아이들뿐, 무엇 때문인지 모두들 그 대열에 끼고 싶은 걸 참고 있다. 하지만 꽹과리 소리는 모든 이들을 나오라 재촉했고 이어 마을 사람들도 따라붙어 흥을 돋우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삶의 고통과 힘겨움을 억누르며 살아온 한에 맺힌 이들과 함께 장의 한 가운데로 돌아올 때면 환한 달이 그들을 밝혀주고 나무가 톡톡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몰려온 이들은 무대를 만들어 빙 둘러앉아 한 곳을 응시했다. 꽹과리 소리가 그치고 나뭇가지에 대접을 돌리는 버림(접시돌리기)이 시작됐다. 버림에서는 접시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릿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소리를 한다. 머리위로 높이 던져 올렸다가 받는 던질사위, 다리사이로 던져 올렸다가 받는 다리사위, 담배대로 돌리다가 막대 두 개를 받쳐 돌리는 무지개 사위, 양손으로 번갈아 던져 받기 등의 재주를 장단에 맞춰 선보인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돌아가는 접시 보랴 소리 들으랴 눈과 귀로 바쁘게 그들을 쫓아간다. 그 뒤를 살판(땅재주)이 이었다. ‘잘 하면 살 판이오, 못 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으로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자반뒤지기, 팔걸음, 외팔걸음, 외팔곤두, 앉은뱅이 팔걸음, 수세미트리, 앉은뱅이 모말되기 등이 있다. 다리를 팔처럼, 팔을 다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저게 사람이여~”라며 감탄한다. 살판에서도 역시 땅 재주꾼과 매호씨의 재담으로 진행되며 장단에 맞춰 곤두질을 한다. 흥겨운 장단과 재담이 오고가는 사이 어느덧 새벽에 다다라있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얇은 옷소매를 스치자 마을 사람들의 몸은 일제히 오그라들고, 재주를 부리느라 땀을 흘린 재주꾼들은 시원하다는 듯 소매로 땀을 닦아 낸다. 유랑 예인들은 이제 사람들의 몸을 오그라들게 한 싸늘한 새벽바람처럼 아슬아슬한 재주인 어름(줄타기)을 선보인다. 어름은 양반집에 불려 다니던 광대줄과 달리 서민을 상대로 순연해 민중 취향에 걸맞는 놀이였다. 어름 역시 재담이 오가고 장단에 맞춰 앞으로 가기, 장단줄, 거미줄 놀이기, 뒤로 훑기, 콩심기, 화장사위, 처녀총각, 외호모 거리 등의 재주가 펼쳐진다. 줄꾼이 높이 매인 줄에 올라서기 시작하면 자신들이 줄을 타는 양 “어…어…아이구”를 연발한다. 이러다 줄꾼이 줄을 튕겨 솟아오르고 떨어질 듯한 연기를 선보인 후 안전하게 줄에 앉아내리면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어름놀이를 보던 한 노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줄타기 말이여. 꼭 우리네 삶 같구먼.”
◀공연의 마지막 부분인 덜미(꼭두각시 놀음).

아슬아슬, 언제라도 떨어져 큰 상처를 입을 것만 같은, 그래서 악착같이 줄에 붙어있어야만 하는 것이……. 유랑극단도 서민의 한 사람이기에 여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버나, 살판, 어름의 흥을 돋우던 재담에는 서민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가뭄이나 홍수로 생활이 힘들 때면 생활고를, 양반의 횡포를, 나라를 빼앗겼을 땐 그 슬픔과 원통함을 그대로 담아냈다. 재주꾼들은 그러한 슬픔을 재주로 풀어내고 서민들은 그들의 재담과 재주를 보며 한을 풀어냈다. 넉넉한 것보다 부족한 것이 많던 그 시절 서민들은 모든 것을 억누른 채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기쁘고 슬프고 화가 나도 그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민들 사이에서 유랑 예인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그들과 같은 서민들의 한을 풀어주었다. 마을에 유랑극단이 왔다는 신호음과 같은 꽹과리가 울려 퍼지면 아이들부터 노인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아슬아슬한 재주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삶을 풍자하는 그들의 재담에 웃음을 짓는다. 이날만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 또, 재주가 끝난 후 선보이는 탈춤에 끼어 함께 춤을 춘다. 탈춤은 덧뵈기라 하며 재주가 끝난 다음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덜미(꼭두각시 놀음)가 공연됐는데 덧뵈기와 덜미는 일제시대 전후로 하여 악극의 형태로 선보였다. 덧뵈기와 덜미가 양반에 대한 풍자가 주를 이루었다면 악극은 남녀간의 사랑, 부모에 대한 효 등 여러 주제로 서민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렇게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된 공연은 새벽 대여섯시쯤에 막을 내린다. 지난밤을 신명나게 논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털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 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재주꾼들은 밤새 흘린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지난밤 신명은 온대간대 없고 남는 건 삶에 대한 답답함과 원통함뿐이다. 그 마음을 한 사발의 막걸리로 달래보려 하지만 유랑 극단의 공연만큼 시원치 않다. 사람들에게 재주를 보이고 서민의 삶을 보여주며 한을 풀던 재주꾼들도 지난밤이 그립기만 하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동안 어느 덧 공연이 시작됐다. 그 사이에 많이도 변했다. 오동나무 대신 철근이 줄을 받쳐주고 있고 흥겨운 장단과 서민들의 삶을 담았던 재담은 어디로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요란한 음악과 허무한 농담들만이 오가고 있다. 그래도 줄타기와 덤블링을 보며 “저게 사람이여~”, “어…어…”하며 감탄하는 모습은 그들의 옛 모습과 닮아있었다. 시대에 맞게 변화한 모습의 유랑 예인들이었지만 덕분에 잠시나마 옛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유랑극단은 떠돌며 재주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우리네의 인생을 보여주고 서민들의 한을 그들이 짊어지고 신명으로 풀어냈던 것이다.
◀어름놀이는 가장 민중 취향에 걸맞는 놀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