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 한해 평안케 해주소서”
11가구의 산골마을 사람들은 흥겨움 속에 하나가 됐다
경쾌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마한시대부터 있었다는
5m 탑 아래에서
주살맥이가 시작됐다

“이제 마을엔 청년이 없어.
우리 죽으면
마을제도 같이
묻히는거지”

마을제를 취재하기 위해 옛부터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옥천군 청마리 말티마을을 찾았다. 깊고 푸른 금강을 따라 아무리 가도 마을은커녕 산과 밭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야 금강에 푹 싸여 웅크리고 있는 말티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당 그당 당 그당 당 그라따당’.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상쇠의 경쾌한 꽹과리 소리가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벌써부터 두루마기까지 다 차려입고 정자 나무 아래서 한참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최씨는 이번에 무슨 소원 빌꺼요?”, “흠, 떡 두꺼비 같은 손자하나 더 보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허허, 원 욕심도”.
벌써부터 마을제에 무슨 소원을 빌까 고민하는 어르신들께 ‘청마리 탑신제’의 내력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어나서부터 이 마을에게 줄곧 사셨다는 최도근(78) 할아버지는 “우리 같이 하는 탑신제는 남한에 네 곳 밖에 없어”라며 말문을 여셨다.
“원래 우리 마을제는 산신제랑 주살맥이 이렇게 나눠서 지내. 산제는 지내는 것이 그 해 그 해 틀려. 올해는 초하루에 가서 지냈지. 일찍 가믄 좋아. 산제 지내기 전에는 아무리 감정이 있어도 안 싸워야 되고, 싸우고 그러믄 불상사납다구 산제를 연기할 수가 있어. 산제는 저기 저짝에 오래된 소나무 아래서 지녀. 그 나무가 신체(神體)여. 정월대보름 때는 탑제, 솟대제, 장승제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디 그걸 합해서 주살맥이 한다고 그랴. 이제 좀 있으면 시작할테니 잘 봐둬.”
할아버지 이야기에 한참 빠져 있다보니 벌써 마을제의 준비가 끝나고, 제주(祭主)가 집에서 한솥 가득 백설기를 가지고 나왔다. 제주는 마한시대 때부터 전해왔다는 5m 탑 아래 정성스럽게 떡을 놓고, 마을 어른들은 모두 제를 지내기 위해 탑으로 모였다. ‘마한시대라……. 그렇다면 저 돌탑은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한 자리에서 마을의 흥망성쇄(興亡盛衰)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으로 세월의 흔적이 파랗게 묻어 있는 돌탑을 바라보니, 마을사람들이 그 탑을 신성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산제나 주살맥이를 신성시한다며 신기한 일화를 들려주셨다.

“내 꼭 그런 건지 모르겠지마는 그전에 젊은 사람들 저녁에 술을 먹고 놀면서 야 오늘 저녁엔 산제 지내는 날이다, 그러고 있었는디. 그날 저녁에 불이 났어. 군불 땐 것이 너무 뜨거워 가지고 포대기에 불이 붙어서 탔지. 인자 나중에 어른들이 ‘봐라, 그렇지 않느냐. 정성이 못 된거다’ 그렸지. 그런 예가 두 번 있었어. 그래서 더 경각심을 가지지. 특히 그 날엔 술을 먹어도 그 날에 풀어야 허구, 싸워구 그러믄 제를 물려. 그래서 서루덜 조심하지.”
곧 제주가 잔을 받아들고 집사가 술을 따라 주자 잔을 놓고 절을 했다. 그 후 집사가 술을 탑에 3번 나누어 뿌리고, 다시 술을 따라 놓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절을 했다. 조용하고 경건하게 탑제는 진행이 됐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만 ‘땡그렁, 땡그렁’소리내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절을 하고 나자 제주가 하얀 종이를 하나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하나 받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종이에 소원을 적으란다. 모두들 진심을 담아 종이에 소원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께 ‘소지기원’을 올렸다. 누구는 마을의 평안을, 누구는 개인의 안녕을, 누구는 풍년과 다산을……. 소원이 적힌 종이에 불을 붙여 재를 탑으로 날려보내며 그 소원이 꼭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소지기원을 마치고 젯상을 솟대 앞으로 옮겨 탑신제와 같이 제를 올렸다. 젯상을 솟대 앞으로 옮기는 동안 할아버지께 솟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풍물패가 마을을 돌며 마을제의 흥을 돋궜다.

“저기 장대처럼 높이 솟아있는 것을 보고 솟대라고 혀. 짐대라고도 부르고. 장대 위에 오리가 있지? 저 오리 대가리가 이렇게 남쪽으로 가게 해야 하는겨. 옛날에 임진왜란도 남쪽에서 들어왔잖아, 그뿐 아니라 병균이고 뭐고 남쪽에서 들어 왔던개벼. 그랴서 비도 적당히 오게 하고, 병균도 막아달라는 뜻으로 오리가 남쪽을 바라보게 한거지. 또 솟대에 숯으로 검은색을 내서 칠하고, 황토로 누런 색을 내서 칠혀. 이것도 다 나쁜걸 방비하기 위해서지.”
솟대제를 지낸 후에는 마을 앞의 천하대장군 앞으로 가 또 한번 제를 올렸다. 천하대장군 앞에서 제를 드리고 집사들은 미투리를 만들어 탑과 솟대, 지하대장군 밑에 가져다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지하대장군에게 미투리를 가져다 놓을 때 나이가 가장 많은 총각이 떡을 갖다 놓고 절을 하면 장가를 갈 수 있다며 총각을 찾았다. 물론 마을에 총각이 있을리 없었다. 결국 탑신제를 구경온 외지 사람 중에 장가 안 간 총각이 장가 가게 해달라고 소원하며 절을 했다. 드디어 제가 모두 끝나고 경쾌한 꽹과리 소리가 다시 마을에 울려퍼졌다.
“이것 좀 먹어봐”. 최도근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제가 끝난 후에 떡과 한과를 건내주시며 같이 음식을 나눠 먹어야 복을 받기 때문에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나눠 먹는거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함께 음복을 해야 정이 생기지. 옛날에는 이렇게 주살맥이가 다 끝나면 마을 청년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샘굿을 했지. 그해 물이 잘 나오라고. 얼마나 재미있고 좋았는디. 샘굿을 가면 보름 나물, 술 뭐 밥 차례루다 착 진열을 해 놓구 하는디 탑신제보다 더 근사하게 했어. 요새 하는건 흥이 안나. 거기서 꽹과리 신나게 치면서 ‘물주세 물주세/ 사해용왕 물주세/ 가재비가 나와서/ 물구멍만 뚫어라/ 물이나 펑펑 나오게 해주십시오’이라구 노래를 하면서 골짝골짝 해서 이 동네 다 돌아다녔지.”
할아버지 눈가에서 그리움이 묻어 났다. 그 시절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성대하게 치뤄내던 마을제를 회상하고 있으리라. 마을제는 옛날 어려웠던 시절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며 서로 화합과 정을 도모했던 소중한 행사였다. 정을 함께 하고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 모두들 정성으로 제를 올리고 기원했다.
물론 늘 그렇게 성대하게 마을제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 시대 때는 마을제가 식량을 낭비 한다며 심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마한시대 때부터 전해왔다는 오래된 돌탑.

“일제시대 때는 식량 낭비라고 해 가지고 술 같은 거 못해먹었어. 쌀이 있어도 밥을 못해먹고 죽 끓여 먹었어야 했어. 내가 그짓말 하는 거 같으지만 밥을 모르게 해 먹고 솥에다 죽을 넣어놔야 했지. 매일 조사가 심하니까 보릿대 짚을 쌓아 놓은데 쌀도 숨기고, 술도 해놓고 그랬지. 솥뚜껑 딱 열어서 밥을 한 흔적이 있으면 클 나닝께. 그래서 그 때는 탑제나 산제를 새북(새벽)에 지내게 됐지. 아무도 모르게 하느라구. 그렇게 일제 시대 때가지 지냈던겨”
그러나 일제의 탄압도 이겨낸 마을제는 오늘날에 와서 그보다 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마을제는 미신으로 치부됐고, 이제 40여가구가 넘던 마을엔 모두들 빠져나가고 11가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해 농사와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던 마을제는 이제 외지인들의 흥미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 마을제는 모두들의 기억에서 과거로만 묻혀질지 모른다. 밝고 명랑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야할 학교는 진작에 폐교가 되어 쓸쓸함만 감돌고 있었다. 과거를 지키고 이어가고자 하는 어른들만이 마을제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마을엔 청년이 없어. 이 마을제가 얼마나 갈지 모르겄어. 내가 죽고, 여기 마을 사람들 다 죽으면 잊혀지는거지. 뭐 세상이 변하면서 요즘 사람들 이런 거 중요하게 생각이나 허나. 안타깝지, 안타까워…….”
할아버지의 쓸쓸한 말이 말티마을을 뒤로하고 떠나는 동안 마음에 계속 맴돌았다. 문득 말티마을의 오래된 탑이 생각났다. 세월이 변하고, 사람들이 떠나가도 그 탑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기대감과 설레임이 있었던 그 마을제를 기억하리라. 조용하고 깊은 금강만이 예전과 같을 뿐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소지기원’을 드리고 있다.

◀탑제와 솟대제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장승제를 올린다.
<허유나 기자>  yunari86@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