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은 정원이 되고 정원은 담을 넘어 산이 되었다
햇살 좋은 토담 앞에서 까치발로 서면 반가운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나의 오랜 벗에게

이제 꽃피고, 향긋한 나물 올라오는 봄일세. 오늘 문득 자네 생각이 나 이렇게 펜을 들었어. 오늘 거래처에 갔다 오는 길에 버스에서 깜빡 졸았다네. 눈을 뜨고 보니 낯선 곳이더군. 황급히 내려 길을 찾는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다녔지만 서울이 다 거기서 거긴거야. 그렇게 한참을 낯선 길에서 헤매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내가 회색빛 담장 안에 갇혀있더군. 키가 크고 높은 담들에 둘러싸인 내가 한없이 작아보였다네. 여기저기 회색담에 잔뜩 둘러싸인 집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인 것 같아 씁쓸했지. 손으로 쓱 만져보았지만 손끝에서 전해져오는 차가운 감촉과 냉랭한 기운은 내가 생각한 그것이 아니었네. 그리고 손끝에서 문득 내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감촉이 떠올랐다네. 따뜻하고 포근한 촉감, 우둘투둘하고 못난… 옛 고향집 토담.
야트막한 흙담 너머에는 늘 자네 집이 있었고, 담은 높지 않아 어린 나도 디딤돌 하나만 있으면 담너머로 자네를 볼 수 있었지. 그 날이 아마 경칩이었을거야, 우리집에 흙담을 새로 쌓던 그 날 말일세. 경칩엔 늘 흙담을 새로 쌓기도 하고, 갈라진 흙담을 메우기 위해 작두로 짚을 잘근잘근 썰어 황토를 버무려 쓱쓱 벽에 발라주고, 짚으로 지붕을 잇기도 했지. 토담을 만드는 그 날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걸 보면 그때 참 즐겁고 신기했던 모양이야. 돌이 많은 고장이야 돌로 담을 쌓았겠지만, 우리야 동네마다 다 흙담이었지. 흙담을 만들려면 우선 진흙에 지푸라기와 석회를 넣어서 발로 쓱쓱 비볐지. 그러고는 그 것을 차곡차곡 쌓은 뒤 비는 공간마다 돌을 넣어 질박한 무늬를 만들었지. 둥글둥글 잘생긴 돌들이 아니라 모나고 못난, 그래서 더 투박한 돌들말일세. 어린 우리는 그 흙을 던지며 장난을 쳤고, 아버지는 담 무너진다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셨지. 그렇게 얼굴과 옷을 온통 흙투성이로 하고 들어가면 어머니께 꾸지람도 오죽이나 들었나.
옛날에는 담을 보면 그 집안 사정을 알 수가 있었지. 과수원을 하던 앞집 순이네 담은 흙담에 기왓장을 예쁘게 박아 넣은 꽃담이었어. 시골 집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흙과 돌, 기와나 그 파편들이 꽃담을 꾸미는 재료가 됐지. 천연이 주는 재료를 써서 멋지게 구조해 내는 재주를 부렸고 깊은 생각과 적절한 지혜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지.

흙이 마르기 전에 눈박이 한 꽃담은 화려하긴 했지만 야하지 않았고, 수수하긴 했지만 고고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 자식이 부족한 집에서는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포도무늬를 박아 넣기도 하고, 즐거움이 가득하길 바라는 집에는 囍(희)자를 넣어 축복의 마음을 담아 모양을 내기도 했지.
아름다운 꽃담도, 수수한 흙담도 한 세월 비를 맞고,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내며 한쪽 귀퉁이가 무너지고, 세월의 흔적을 훈장마냥 몸에 달았지. 여기저기 갈라진 흙담은 흉하다기 보다 자랑스러워 보였고, 그게 어울려 보였다네. 넘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굳건히 그 곳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특스럽기도 하고, 든든해 보이기도 했지. 그 흙담에 기대 햇살을 쬐고 있노라면 행복감과 포근함이 온 몸을 감싸는 것 같아 늘 좋았다네. 흙담엔 시래기가 걸려있고, 사랑방엔 메주가 달려 있었지. 시래기만 바라 봐도 배가 고파오고, 메주만 바라봐도 침이 절로 돌았었어. 집집마다 마당 한쪽에서 감나무가 열매를 맺고 포도덩굴이 제멋대로 흙담벼락을 타고 올라오고, 도롱이·채·멍석 등이 매달린 흙담 안쪽 방 앞 들마루에는 햇살이 층층이 내려앉았었지. 그리고 아련한 흙내음과 할머니의 손처럼 거칠었지만 따뜻했던 촉감……. 늘 꿈처럼 그 때 생각을 한다네. 가끔은 기억이 모호해져 사실이었는지, 꿈인지 헷갈릴 때도 있어. 너무 오래된 기억이 아닌가.
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농촌의 생활환경은 변화되기 시작했지. 그 대상은 다름아닌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인 농촌의 초가 형태의 취락구조였어. 가난의 상징처럼 버티어 온 초가, 꼬불꼬불한 비좁은 마을 안길, 그리고 토담……. 그들의 눈에 이것들은 농촌을 낙후시키는 하나의 의미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네. 결국 초가집의 지붕들이 다 헐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낡은 흙담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네. 그리고 그것을 채운 것은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이었지.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흙담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세월, 추억, 그리고 전통이라네.
◀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전남 담양군 소쇄원의 토탐

우리에게 담은 어떤 의미였을까? 옛날에 담은 도적을 막고, 내 재물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기보다 그저 ‘여기까지가 내 땅입니다’하는 표식정도밖에 되지 않았지.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을 중요시하여 자연과 친숙하기를 즐겼고, 그런 생각은 담에서도 여실히 들어나.
동산이 담을 넘어와 후원이 되고, 후원이 담을 넘어 번져 나가면 산이 되고 말지. 그것이 우리네 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담은 어떤 의미인가? 외부로부터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려고 튼튼한 시멘트로 높이 쌓고, 심지어 그 위에 철조망까지 쳐서 외부와 차단을 시키는 하나의 방패라네. 담은 그 집의 얼굴이야. 담에는 표정이 있고, 그 집의 권위와 느낌, 주인의 사상과 개성이 담겨 있지. 그러나 지금은 표정도 없고, 개성도 없어. 모두 똑같은 모습, 판에 박힌 얼굴들이야. 남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이기심이 매끈매끈하고 차가운 회색담에 여실히 드러나지.
세상은 변했고,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던 우리네 토담은 추억 속으로 잊혀져가고 있네. 흙담 밑 이름모를 풀꽃도, 흙담을 따라 이어진 좁은 골목길도 이젠 옛날이야기야. 이젠 고향에 가도 푸근함이 느껴지질 않아. 그곳은 이미 서울이 다 됐어. 추억을 잃었고, 고향을 잃었고, 마음의 정처(定處))도 잃었네. 내가 이 서울에서 산 지도 30여 년이 다 되었어. 흙으로 질게 빚어놓은 못난 담보다, 매끈한 시멘트 담이 더 익숙해질만한 세월이지. 그래도 정이 가질 않고 거부감이 드는 건 사람 냄새가 없고, 추억이 없기 때문일게야.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사는 내가 그래도 옛일을 함께 추억할 자네가 있어 다행일세. 언제 한번 함께 술 한잔 하세나. 비록 고향의 포근했던 흙담 아래는 아니더라도, 자네와 내가 잃어버렸던 그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세. 그 때는 앞집 순이도, 아련한 흙내음도, 동구 밖도 다 어제일만 같겠지, 동장군이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며 한껏 심술을 부리고 있는 요즘일세. 다시 보는 그때까지 건강하게나.

도시의 회색빛 담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다시는 쌓이지 않은 흙담을 추억하며…….
◀ 낡은 토담을 타고 오른 넝쿨이 정겹다.
<허유나 기자>  yunari86@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