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빌딩과 청계고가를 보고 고향떠나 서울로 온 사람들
이때부터 서울의 삶은 바빠지고 고달퍼지고 생각도 많아졌다

북에서 월남한 구보씨는 70년대 초입의 서울을 관찰하는 만보객이었다

1969년 말미 나타나 서울 거리를 거니는 구보(丘甫) 씨는 낯익다. 이미 1930년대에 나타나 식민지 경성의 거리를 거닐며, 식민지 지식인의 자의식을 보여줬던 구보 씨는 40여년의 시공간을 뛰어 넘어 부활한다. 식민지 도시 경성에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로 이름을 변경한 공간에 서있는 구보 씨, 그는 여전히 서울의 곳곳을 거닐면서 관찰하고 비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경성에서 서울로 변화하면서 확대된 외연을 따라 그는 눈동자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최인훈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 씨는 냉전시대에 유화국면이 형성되고 있던 1970년대 초입에 다시 나타나 서울이라는 공간을 관찰하는 만보객이다. 그는 소설가이지만, 그는 1934년의 구보씨처럼 고정적인 직업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30년대의 구보씨에 비하면 규모가 커진 문학 산업으로 인하여 원고청탁이나 문학전집의 해설 등의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해할 수 있다. 비록 넉넉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서울의 경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서울로 편입된 곳에 산다. 30년대의 구보 씨가 경성의 중심을 흐르고 있던 청계천에 살았다면, 그는 전대에는 새롭게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서울의 변두리에 산다. 그는 서울의 외연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한옥에 하숙을 한다. 30년대의 구보 씨가 천천히 부유하듯이 경성의 중심부를 관통하면서 모던화 된 경성의 외양을 관찰했다면, 70년대 구보씨는 걸어서는 움직일 수 없다. 1970년대 서울은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걷고, 차를 타면서 공룡 도시 서울을 거닐며,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거나,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상사를 거론한다.

그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문학의 장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지만, 조국근대화의 위업으로 찬란하게(?) 발전하고 있는 70년대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다양한 군상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어찌 보면 ‘조국 근대화’의 또 다른 이름은 ‘무작정 상경’을 통한 ‘서울 인구의 과다집중화’였을 것이다.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주택난이 발생하고, 주택난 해소는 택지 개발로 이어지게 되고, 택지 개발은 과거 농토였던 땅을 밀어버리는 위대한(?) 개발의 역사와 함께 했던 것이다. 70년대 서울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수는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이다.
이미 해방이 되면서 인구가 몰려들기 시작한 서울은 70년대에 이르면 외연의 확장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때 행정수도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도시의 과밀화를 막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한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구보 씨도 서울로 이입된 인구 중 하나이다. 다만 그는 갈 고향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한 내에서 이동한 인구들과는 다르다. 그는 북한에서 월남한 실향민이다. 그가 자주 찾아 가는 김순남 씨도 그와 같은 실향민이다.
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들에게 ‘서울’은 정감이 가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들의 자식은 서울에서 출생했다. 현대인들에게 고향이라는 것은 회귀라는 원형적인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상상 속의 장소일 뿐, 실체는 아니다. 북한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김순남 씨가 생각하는 고향과 그의 국민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 생각하는 고향은 성격이 다르다. 김순남 씨와 구보 씨에게 고향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중요한 공간이겠지만, 그의 다음 세대들에게는 그저 전래동화에서 등장하는 상상력의 공간일 뿐이다. 이미 서울에서 성장한 세대들에게 고향은 전대의 이미지를 벗어나, 자신이 출생한 곳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구의 집중은 도시 주변을 집어삼키며,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건설한다는 미명 하에 인공적인 구조물들을 양산시켰다. 구보 씨가 찾아간 김순남 씨의 삶의 공간인 청계천의 세운상가 또한 복개로 인하여 청계천이 자연적인 하천에서 도로의 지명으로 바뀐 상황에서 이뤄낸 것이다. 1967년 청계천의 남북의 가로지르며 형성된 4개의 주상복합건물의 연합건물인 세운상가에서 그의 친구 김순남 씨는 전자제품을 판다. 그의 업종은 당대 최고의 첨단 건물에 걸 맞는 것이다.
새롭게 형성되는 시가와 구조물들은 새로운 서울의 모습을 상징하며, 사람들에게 조국근대화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강조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적인 이미지에 도취되면, 서울은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는 유토피아의 공간이 된다. 1970년대 교과서에 의무처럼 수록되었던 삼일로 주변의 청계고가도로와 삼일빌딩 사진은 서울을 동경하게 하는 신기루였던 것이다. 동경하던 서울에 온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체감했던 배신감과는 관계없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사람들은 서울에서 삶의 닻줄을 내렸다. 그리고 구보 씨는 그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소설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70년대의 구보 씨가 만나는 사람들은 30년대의 구보 씨가 만나는 사람들처럼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모두가 바쁘다. 아니면 바쁜 척한다. 서울의 외연이 확장되고,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 확대되고, 삶의 속도감까지 배가되면서 구보 씨가 가봐야 하는 곳도 늘게 되었다. 구보 씨는 혼란스럽다. 사람이 많아지면 생각도 많아지는 것인지…….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서울 중심부에 서 있는 세운상가 역시 김현옥 전 서울시장의 결단으로 탄생되어 콘크리트색이 바랜 채 아직 서 있다.
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