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배’는 ‘덕배 조’가 될 수 없다
「서울구경」의 스프가 흰죽이 될 수 없듯 「아내를 빌려 줍니다」의…

“우리의 생활이 서구화되기 위해서는
속은 물론이고 껍데기까지 벗겨내는
아픔의 과정이 따른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돈 되는 장사는 ‘영어 콤플렉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최근에도 한국 내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강사들의 추문과 자격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영어’란 특권적 지위의 상징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빠다를 많이 바른 세대의 등장으로 ‘영어 잘 한다’는 것만으로도 돋보이던 상황이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한국인들의 대다수는 ‘영어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김주영의 「아내를 빌려 줍니다」(『창작과 비평』, 1975)의 ‘덕배 조’는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 무역회사의 관리상무로 취직한 인물이다. ‘덕배 조’가 무역회사의 상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찍이 흑인 미군 상사 ‘조지 팍’의 양아들이 되어 아메리카에서 5년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가 영화 속 선망의 대상인 백인 아내를 데리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백색에 대한 한국사회의 선망이 중뿔날 것 없던 그를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무역회사의 상무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박색(薄色)이기는 하지만 늘씬한 키와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고, 게다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국민이 아니던가. 미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인종적, 국민적 우월성이 암묵적으로 공인되는 시점에서 새까맣고 키 작은 ‘덕배 조’가 백인 미국 여성과 결혼을 했고, 이 여성과 귀국을 했다는 것은 ‘덕배 조’의 지위를 올려놓을 수 있는 강력한 표상이 된다. 한국에 있을 때 미8군 사령부 밖의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하던 ‘조덕배’가 미국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시장(市長)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기흥산업주식회사의 관리상무가 될 수 있었던 것에도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영어 구사 능력이 전문적인 수준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서울에서 무역의 중심이 된 태평로 일대에서 영어학원의 명강사로 소문날 수 있었던 것에는 백인 아내와 동반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특이성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내재한 미국으로 상징되는 백색의 콤플렉스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엘리자베스의 체형에 비하여 상대적을 왜소한 그가 백인의 미국인 아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왜소한 한국의 남성들에게 대리만족의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도 ‘덕배 조’처럼 흰 색 피부를 지닌 미국인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내수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나라에서 밖에다 팔아야만 국가의 재정을 살찌우고, 개인들의 삶 또한 윤택해진다는 수출지상주의의 구호가 일상처럼 되어 버린 곳에서 영어는 생존을 위한 무기이기 이전에 타인과 차별화되는 상징적인 기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국’이라는 요소의 결합은 영어로 상징되는 추상적 우위를 구체적인 형태로 바꿔놓은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것이 된다. ‘조덕배 → 덕배 조’라는 성과 이름의 바꿈은 단순하게 영어식 표현만이 아닌, 힘의 논리가 이름 표기법에서도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흥산업주식회사의 ‘도상태’ 사장은 덕배보다는 백인 여성을 첩으로 두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여 자신이 정열적인 사업가임을 드러낸다. 물론 계약적인 관계에 의한 것이지만 백색의 여성을 대동하여 이국적 성향을 띠는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국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던가! 자신의 사업 영역이 한국이라는 국지적인 공간을 넘어서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주는 ‘엘리자베스’는 ‘백인 여성’이라는 표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울 구경」(『월간중앙』, 1977)은 이러한 서울의 현실은 동물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물원은 ‘만화경’과 같은 세상이지만, 이러한 세상이 서울의 현실이다.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 떼들은 인간세계의 축소판이다. 그래도 원숭이는 본능에 충실하지만, 인간은 허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서구적인 것이 생활의 전범으로 부상된 현실에서 ‘미국적인 것’은 따라가야만 되는 당위성의 목표 지점에 있는 이상적인 것이 된다.
「서울 구경」에서 늙은 어머니와 형수는 작은 아들 내외의 생활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를 동경한다 해도 수용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머니는 원숭이가 보여주는 것처럼 본연적인 인간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서구화된 작은 아들 내외에게는 이상화된 가족을 가능하게 하는 선진국적인 전범이 내재화되어 있기에 불가능하다. 1960년대 이후 인구증가를 막기 위한 정책으로 도입된 가족계획 정책의 내면에는 ‘외국의 선례’라는 전범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화의 과정에는 자신의 신체까지도 변화시켜야 할 체질 변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된장만을 먹고 생활했던 ‘형수’가 흰죽인줄 알고 먹었던 스프를 모두 게워내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이 서구화되기 위해서는 속은 물론이고 껍데기까지 벗겨내는 아픔의 과정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서울 구경」의 스프가 흰죽이 될 수 없듯이, 「아내를 빌려 줍니다」의 ‘조 덕배’는 ‘덕배 조’가 될 수없다. 다만 그가 ‘덕배 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로 표상되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의식이 근저에 있었던 것이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구호가 난무하는 1970년대 서울에서 미국적인 것의 가치는 이렇게 표상만으로 난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적인 것은 엘리자베스의 희고 탄력 있는 등허리 살처럼 매혹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 과거와 현재, 서구문화와 우리문화가 공존하는 태평로의 전경.
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