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취업과 고시준비를 위한 학원으로 전락했다는 한탄이 나온지도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오히려 상아탑 정신의 위기를 말하면, 아직도 위기냐는 냉소적인 푸념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 익숙하다. 그러면서 대학생들은 소비자로서 혹은 취업준비자로서만 사회적 이슈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 대학은 사회 변화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의 위상 변화에는 대학 외적인 요소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토익점수로 표현되는 영어열풍, 갈수록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은 점차 대학생의 삶 자체를 제도권에 종속시키는 현상을 가져왔다.
혹자는 입학하자마자 학점과 취업준비에 매몰되는 대학생들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학점이라는 것이 대학이 마련한 교육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취업준비는 개인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측면에서 마냥 비판할 일만은 아니다.
반대로 이를 하지 않는 학생들에 대해서 그럼 과연 당신은 어떠한 대안을 마련하고 있느냐고 따져묻는 것이 더 의미있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실의 대학인의 삶과 이런 삐딱한 질문 사이에 또 다른 길이 희미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80년대는 거시적인 사회의 방향성으로 개인의 일상을 규정하던 시대였다. 이는 사회 개혁을 이끌었다는 측면에서는 평가받을 만하지만, 각 개인의 개성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일면 부작용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작용은 그 이후의 세대들이 거시적인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일을 소홀히 하도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개인의 진로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토론과 비평 등에 시간을 투자해서 뭐 얻을 게 있냐는 말이다.
그러나 기성의 질서는 미래를 예견해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과거 대학생들이 밤낮으로 노력하여 획득한, 변호사, 회계사, 의사, 기자 등의 직업의 위상은 예전만 같지 않다. 남들 놀 때, 자신의 전 대학생활을 투자하여 이러한 지위를 획득한 후, 오히려 그 개인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상실감에 빠질 지도 모른다.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변호사나 회계사, 구조조정에 시달리는 기자의 처지를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엇이 되기 위한 준비와, 그 무엇이 향후 어떻게 변화하는지 통찰하는 능력은 별개이다. 무엇이 되기 위한 준비가 기성질서가 제시해준 길을 차분히 밟아가면 되는 일인 반면, 변화의 흐름을 보는 눈은 기존의 제도가 포착하지 못한 것들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직업의 위상 변화일 수도 있고, 보다 폭넓게 이야기하자면 동아시아 내의 한류 중심의 문화적 변화일 수도 있다. 5년 전 할리우드 문화를 수입하려는 직업을 택한 사람과, 미리 한국문화의 수출을 준비한 사람의 위치는 현재,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똑같이 무엇이 되기 위한 준비를 했더라도, 사회변화의 흐름을 읽은 사람과 못 읽은 사람의 차이가 진로의 성패를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에서 하루하루 앞만 보고 남들이 하는 것만 따라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묵묵히 가고 있는 길이 혹시 벼랑으로 향하는 것은 아닌지 그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를 방지해주는 것이 바로 거시적 관점이고, 자기 할 일을 하면서도 반드시 이런 관점을 얻기 위한 시간투자를 따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생들이 사회개혁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낡은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향후 한국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구조적 변화, 더 나아가 미국문화권에서 점차 이탈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문화공동체 형성 등등, 제도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는 일은 모두 개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칫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잘못된 길을 갔을 때, 이를 보상해줄 기성제도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상에 충실한 것은 이제 대학생들의 기본 의무가 되었다. 무엇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자신의 개성에 맞는 취미와 여가생활을 즐기고,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개인의 삶에 소중한 경험이 된다.
그 과정에서 단 5%의 시간이라도 사회의 큰 흐름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이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위험을 방지해줄 수도 있지만, 이런 5%의 시간들이 모이면 그 자체가 바로 기성질서가 놓치고 있는 사회변화의 흐름을 주도할 힘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변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