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군주시대에는 제왕이 보위(寶位)에 오르면 의례적으로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조선시대에는 스스로 제후국이라 인식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만약 연호를 사용했다면 불충(不忠)으로 여겨 안팎으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국(黃帝國)인 명(明)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러니 당하관(堂下官) 중에서도 낮은 벼슬의 관리(어떤 때에는 환관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가 오는 데도 극진한 예우를 다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 사신을 천사(天使)라 칭하였고, 사신이 머무는 곳을 모화관(慕華館)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 영접을 하였으니 한마디로 굴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1년에 정기적으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황제나 황후의 생일, 황태자의 출생 등 소위 천자(天子)의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신을 보내야만 했다. 그 당시 국력이 미약해 그렇게 했다지만, 조선(朝鮮)이 주권국가로써 이처럼 저자세의 사대외교(事大外交)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게 계속되다 청(淸)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를 대신하자,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의 연호 사용을 꺼렸다. 이는 숭명의식(崇明意識)과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청나라가 오랑캐라는 것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고수하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또 최명길(崔鳴吉) 등 일부 사대부들은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라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사고관(思考觀)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화(中華)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인식했는지…. 그러나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법. 조선말까지 개인적으로는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사용하는 사대부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은 우리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져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도 그들 나름대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씁쓸하기만 하다. 어쨌든 우리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고종(高宗) 때 부터(물론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나 신라 법흥왕 때 연호를 사용했지만) 였으니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사대주의 의식 때문에 제후국에서의 연호 사용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미암일기』에 있어 소개한다.
“날이 밝아서 경연청에 올라가 영사(領事) 앞에서 글을 강하고 물러나와 무명 직령(直領)을 입고 경연청에 들어가 입시하여 『논어』의 <영윤자문(令尹子文)>장을 강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올렸다.… ‘초(楚) 무왕(武王) 웅통(熊通)이 참람(僭濫)하게 제왕이라 스스로 일컬은 것이 자문(子文:초나라 성왕 때의 재상)과는 서로 백 년의 세월이 떨어져 있는 데도 오히려 그 천리(天理)에 어긋남을 바로잡아 고치지 못했는데, 굳이 자문을 책한 것은 자문이 바로 초나라의 상경(上卿)으로 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문이 비록 자기 집을 망쳐서 초나라의 근심을 덜게 하여 그 나라에 충성을 다했지만, 중국을 어지럽게 하고 제후국을 침노하여 멸망시키는 일을 몸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안중에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없었던 것이오니, 그 아비를 도우면서 그 조부를 업신여기고 깔보는 격입니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참람하게 연호를 쓴 것은 사대(事大)의 의(義)를 모르는 일인 것이니, 그 당시의 신하들이 너무도 무식했던 때문입니다. 무릇 제후는 마땅히 천자의 나라를 정성껏 섬기고 신하는 그 임금을 정성껏 섬기는 것이 대의입니다’ 하였다.”
유희춘은 제후국이 천자의 나라를 업신여겨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연호 사용에 대해서도 사대(事大)의 의리를 모르는 무식함의 소치라고 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대부분 유희춘처럼 사대주의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희춘의 이러한 사대주의 의식은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당시 사대부들의 한계요, 유희춘의 한계였던 것이다. 결국 유희춘은 이 같은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국력의 미약함을 재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임제(林悌)가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여러 나라가 스스로 제왕이라 일컬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 제왕이라 일컫지 못하였다.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는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그러니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고 하였는바, 그 의미가 심장하다. 이 말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자. 우리나라가 주권국가·자주국가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제분야에서 당당해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력이 강해야 한다. 동북아 균형자 역할도 국력이 약하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점을 명심하고 열심히 노력하자.
송재용<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송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