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고된 하루,
복잡한 세상사에 치여
정이 있고, 술이 있는
선술집으로 간다

밤이 깊을수록 선술집엔 ‘세상먼지’로 가득찼다
혼자 왔다가도 둘이 되고, 셋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되고…

주막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 고단한 하루에 지친 목을 막걸리로 축이던 곳이었다. 얼마나 묵었는지 모를 쉰 김치 한 조각에 하루의 피로는 씻은 듯이 날아갔고 그곳에서 만나는 마을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게 했다.
몇 십 년이 지나 주막은 대폿집, 선술집이라는 이름으로 길거리에 다시 나섰다. 옛 주막에 비해 그 모양새는 변했지만 사람들을 쉬어가게 하고,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그대로이다. 또다시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주막도, 소박한 선술집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선술집을 찾아 종로에 위치한 피맛골을 찾았다. 피맛골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길이다. 종로를 지나다 말을 탄 고관들을 만나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서민들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큰길 양쪽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다니는 습속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민들이 이용하다 보니 피맛골 주위에는 선술집, 국밥집 등 술집과 음식점이 번창했다. 예전에는 현재의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종로 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 3가 사이에 일부가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는 고관들이 아닌 시끄러운 세상에서 잠시 피할 수 있는 길이 됐다.
두 사람이 나란히 겨우 걸어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해장국, 생선구이, 빈대떡 등을 파는 식당과 술집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고층건물 사이에 있는 골목이라 낮에도 어두침침하지만 파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 생선을 굽는 비린내가 발길을 잡아끈다. 이것이 하루를 마무리하게 하는 냄새이다.
골목에 들어서자 열차집, 우정집 등 단순한 이름의 간판들이 따개비처럼 붙어있다. 피맛골에 들어가기 전 바로 옆에도 식당과 술집이 자리해 있는데 피맛골의 이것들과는 달라 보인다. ‘원조’, ‘진짜’등의 수식어로 서로가 맛있는 집이라며, 자기네의 가게로 오라고 떠들고 있다. 하지만 이곳 피맛골은 이런 소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좁디좁은 골목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날이 어두워질수록 피맛골 골목에는 사람으로 가득찬다.
작은 선술집 안에는 작은 탁자 3개와 한 사람이 겨우 일할 수 있는 공간의 부엌이 전부다. 출입문도 너무 작아 한 명씩 차례로 들어가야 한다. 손때에 누렇게 변한 벽에는 5천원 내외의 안주 대여섯가지가 적힌 메뉴판과 알 수 없는 낙서가 눈에 들어온다. 그 메뉴판 아래에 손님들이 마주 앉은 상이 참으로 간단하다. 막걸리 한 병과 김치 한 접시, 이 두 가지가 전부다. 그 김치 한 접시로 세상살이 이야기를 이어갔고, 막걸리 한 사발로 인연을 맺는다. 누군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서 앉아요”라며 집안 식구를 맞듯 맞이해 준다. 그렇게 하나, 둘 모인 손님들은 직업도, 나이도 다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주인 할머니는 손님들을 자식들을 챙기듯 적당한 안주를 골라 술과 함께 내어주고 파전이나 따뜻한 국물을 “많이 잡수”라며 상에 놓아준다. 밤이 깊어 갈수록 담배 연기에, 손님들이 세상에서 묻혀온 먼지에 작은 선술집 안은 뿌옇게 변한다.

얼큰하게 취기가 돈 한 손님이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가 싶더니,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음정은 제대로 맞지 않지만 선술집의 손님들은 그 가락에 박자를 맞춰주며 지그시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보며 흐뭇해한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자연스레 옆에 앉은 이가 또다시 노래를 시작하고 또 그 옆으로, 옆으로 구성진 노래가 이어진다. 노래 한 자락으로 분위기가 무르익고, 또다시 이어지는 이야기로 술을 마시다보면 어느 덧 술독은 비어져있고 밤은 깊어져 있다. 그러면 주인 할머니는 손님들이 더 취하기 전에 하나, 둘 집으로 돌려보낸다. 선술집을 나서는 이들의 표정은 들어올 때와는 사뭇 달라보인다. 근심 걱정을 잊은 즐겁고 편안한 표정.

내고향 집은 대폿집 가는 길 가
오가던 술꾼들이 도르레 삐걱문 열어
조석걱정 잊은 얼굴로 술기운 안부를 묻고
더러는 주안상 차려 놓고 입소리로 밤 새던 곳
(신재경의 「고향집」중에서)

걱정 잊고, 끝없는 이야기로 밤을 새는 곳이 선술집이다.
옛날에도, 지금도 서민들이 오가는 길에 주막과 선술집에 들를 수 있었던 것은 싼 가격의 술과 안주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거기에 함께 얹어지는 정과 주모의 인심 때문이었다. 좁은 공간의 선술집은 혼자 왔다가도 둘이 되어, 셋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되어 선술집을 나서게 되는 공간이다. 요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술집의 규모는 크고, 인테리어도 멋지게 꾸며놓았지만 그곳에서 친구를 사귄다던가, 그 술집 안의 모든 이들이 함께 노래를 한다던가 하는 일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술집은 다르다. 옆 손님이 친구가 되고, 손님이 없을 땐 주모가 술친구가 되어 준다.
소박한 한 상으로 친구가 되고, 좁은 골목길에서 어깨를 부딪치면 그 인연으로 술상으로 마주하기도 하는 이곳. 좁고 허름한 곳이지만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정에 그리운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밤도 선술집에는 일상에 지친 이들의 온갖 이야기로 채워진다.

▲ 종로 1가에서 종로 3가 사이에 위치한 피맛골.

▲ 큰 규모의 술집들에 밀려 대폿집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황영아 기자>  baby222@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