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한국 문화 / 추석 - 풍요의 문화

전 부치는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대문을 넘어 가던
‘추석’의 설레임

세상이 변했어도 가족과 함께 걷는 한가위 고향길은 정겹다
가고 오는 길 바빠 강강술래, 달맞이, 윷놀이 등 민속놀이 사라져 아쉬워

긴긴 여름동안 작렬하던 태양은 사그라들고, 이젠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백로(白露)가 지나고 햇빛이 쨍쨍하던 요 몇일, 가을 들판의 벼들은 제법 누런 빛을 내기 시작했고, 오곡백과는 그 속을 꽉꽉 여물였다. 그리고 음력 8월 15일,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이제 며칠앞으로 다가왔다.
얼마남지 않은 추석을 맞아 한참 분주할 재래시장을 찾았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며, 비릿한 생선 냄새는 여전했지만 재래시장은 명절을 앞둔 그 모습이 아니었다. 시장에 장보러 나온 이들은 물론, 한참 바빠야 할 상인들도 한가해 보이기만 했다. 시장 골목골목을 한참 헤맸지만, 추석의 분주함과 설레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떡 방앗간을 하는 아주머니 한 분을 붙잡고 “이제 곧 추석인데 많이 바쁘시겠어요?”라고 묻자 이내 손사레를 치며 “명절이 대목이라는 말도 이젠 옛 말이야. 요즘엔 가뜩이나 경기가 더 안좋아져서 추석에도 장사가 잘 안돼”라며 쓴 웃음을 지셨다.
옛날 그 가난했던 때도 어려운 살림에 조금씩 모아 둔 쌀로 떡을 찌고, 음식을 해 이웃과 나눠먹으며 마음만은 풍요롭게 추석을 보냈다. 그래서 그 날 한가위만은 거지도 배를 두드리며 더도 덜도 말고 가위만 같아라 했다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추석 풍토는 꽤나 많이 변해버렸다. 고향을 찾고, 부모를 찾고, 조상을 찾아 전통에 따라 명절을 지키기도 하지만, 사오일 씩 쉬는 기회를 틈타서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거나, 조용한 곳에서 깊이 쉬면서 숨을 새로 고르기도 한다. 복잡하고 힘든 일상을 떠나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도 많다. 이것 저것 준비해서 제사지내기가 귀찮아 시장에서 사온 전들을 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아예 온라인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제사상을 차려놓고 그것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풍요로움의 상징이던 한가위가 어느새 이토록 각박하게 변해버렸을까?

예부터 설날이나 추석 같은 전통 명절은 축제에서 비롯됐다. 기록상으로 추석의 시작은 신라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3대 유리왕 때, 경주 6부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고, 각각 왕녀의 지위 아래 7월16일부터 한 달 동안 옷감을 짜게 했다. 8월15일이 되면, 양 편이 짜 놓은 옷감의 많고 적음을 가려서,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여기에 춤과 노래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이 행사를 가배(嘉俳)라고 하는데, 추석을 가리키는 한가위의 ‘가위’라는 말은 이 가배에서 나왔다.
일부에서는 ‘가위’라는 말이 ‘가운데’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가위는 가을의 한 가운데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결국 가을의 한 가운데 있는 추석은 1년 농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 준 데 대해 하늘과 조상에게 감사하는 날인 것이다. 전통 축제에 놀이가 함께 하듯이, 사람들은 추석 때 여러 가지 놀이를 즐긴다. 1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인 만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때가 추석이었다. 씨름, 강강술래, 달맞이, 소싸움 등은 오늘날에도 추석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놀이들이다.
또한 추석은 ‘달’과 관련된 행사다. 추석에 저녁을 뜻하는 ‘석’(夕)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은 달맞이가 곁들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추석의 대표적 음식인 송편도 ‘달떡’이다. 달의 모양을 본떠, 둥글게도 만들고, 반달 모양으로도 만든다. 또 ‘반보기’라 하여 시집을 간 여자들이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던 옛날, 추석 명절날 모녀가 중간 지점에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 한나절 동안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모녀간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60~70년대에 들어 산업사회로 변모하면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추석’은 오랫동안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는 날이 됐다.
공장에서 일하며 조금씩 모은 돈으로 고향에 있는 부모님, 동생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산 선물들을 손에 들고 찾아가는 그 길은 설레임이요, 행복이었다. 그 시대 인기있는 선물이라면 밀가루, 설탕, 라면 등 식품류 등이었고 지금에야 지천에 널려 있지만 당시에는 고급 선물로 여겨졌다. 6㎏에 7백80원에 판매되던 ‘그래뉴설탕’ 은 상류층만 주고받을 수 있었던 고가품이었다. 미풍, 통조림 등도 고급 선물이었고 세탁비누와 라면, 맥주 등도 받고 싶은 선물로 꼽히곤 했다. 이젠 추석선물로 정육, 굴비, 건강, 명품 특선 세트, 동충하초·홍삼·더덕 등으로 구성한 웰빙세트 등이 인기라니 그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만하다.
최악의 경기침체로 장바구니는 갈수록 텅 비기만 하고, 추석을 준비하는 손길이나 선물을 준비하는 마음들이 부담스럽고 어려워져만 간다. 삶에 치여 각박하게 살아갔지만 내 어머니, 내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으랴.
올해도 하루벌이에 치여 시골의 부모님께 갈 수 없고, 빈 손으로 고향을 찾을 수 없어 서울에 발목이 잡힌 이들이지만 어릴적 복작되고 즐거웠던 추석의 기억만으로 벌써 마음이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것이다. 시절이 변하고, 세월이 바뀌어도 전을 부치는 기름냄새와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웃음이 대문밖을 넘어 가던 그 날의 설레임과 기대감은 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무심코 올려다 본 까만 하늘, 노랗고 둥근 달은 어렸을 적 보던 그 달이다. 그 달속엔 생활은 고되어도 마음만은 풍요롭고 행복했던 그 때, 그 한가위가 가득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