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서울61

정찬의 「푸른 눈」과 서울 미문화원 점거

1985년 5월 23일 미문화원을 점거한 73명의 대학생
이로부터 아메리카가 지상최고의 낙원이라 생각했던 한국에서는…

「푸른 눈」 속의 아버지는 하우스 보이였다.
물건을 숨겨 나오다 폭행당하는 아버지를
보는 아들의 뇌리에 ‘푸른 눈’은 살기를 내뿜는 존재로 각인된다.

1985년 5월 23일, 12시 서울 을지로의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서울대· 고려대·연세대·서강대·성균관대 등 5개 대학 학생 총 73명은 5·18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시인하고 사과를 요구했다.
6·25전쟁이 휴전 상태로 고착화된 이후 반미운동의 무풍지대였던 남한에서 공개적인 반미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은 한국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준 국가이자, 6·25전쟁 때는 북한공산주의 정권의 적화 야욕을 남한인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막아낸 혈맹의 국가였다.
그런데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것들이 우리의 우방 미국을 비난하며 미국문화원에 들어가 미국의 사과를 요구한다. 해방 이후 ‘반미는 곧 빨갱이’라는 무의식적 합의가 이뤄진 남한 땅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당황한 것은 미국과 제5공화국 정권뿐만이 아니었다. 전쟁 이후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반공이데올로기가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통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대다수가 미국에 대하여 우호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을까? 정찬의 「푸른눈」(『문예중앙』, 1988)은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에 동참한 아들을 찾으러 상경한 아버지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면서 대한민국에서 미국이라는 표상이 갖는 의미를 찾는 작품이다. 미국문화원 점거에 가담한 학생 중에 자신의 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충격에 휩싸이는 아버지 ‘그’는 무조건적인 모성애로 아들을 애타게 찾는 어머니도, 아들이 세상물정 모르고 날뛰는 철부지 취급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아니다. 그는 아들이 있는 서울 미국문화원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가 서울 미국문화원을 찾아가는 길은 소년시절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자, ‘푸른 눈’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존재를 기억 속에서 꺼내야 하는 과정이다. 병든 할아버지와 누이를 두고 월남했던 ‘그’는 아버지가 미군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미군 측에 의하여 하우스 보이가 된다. ‘그’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가는 철도의 업무를 검열하고 감독하는 미군 장교들의 식사 준비와 시중을 드는 특수한 하우스 보이이다.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의 지긋지긋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세계로 나간 ‘그’는 첫 직장에서부터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로서의 미군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신성불가침 대상으로서의 미군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숨겨 나오다 미군병사로부터 맞는 것을 목격하면서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미군의 모습은 푸른 눈의 살기를 내뿜는 존재로 각인된다. 역설적이게도 폭력적인 아버지를 두들겨 팬 미군을 동경하는 소년은 ‘푸른 눈’의 소유자인 미군을 ‘거인’과 동격화하고, ‘푸른 눈’의 행위에 자위를 통하여 동승함으로써 환상 속에서나마 ‘푸른 눈’의 소유자와 동일화되었다고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마치 자신의 정액이 분출되기 직전까지의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것은 자신과 제임스 대위를 동일시하면 아래에 깔린 여성으로부터 힘의 우위를 느끼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동일화는 ‘왕’과 ‘신민’의 주종관계를 뛰어 넘고자 하는 욕망을 발생시킨다. ‘그’는 자위라는 환상성의 허무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는 ‘푸른 눈’의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푸른 눈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이 황색의 누추함에서 벗어나 푸름으로 상징되는 그들의 질서 안에 진입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푸른 눈’과 결코 동일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는 제임스 대위의 지갑에 손을 대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가 당했던 폭력을 경험하면서 ‘푸른 눈’에 대한 절대적 대상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은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참으로 황당한, 혹은 당혹스런, 혹은 처음으로, “쥐새끼들 같던 한국인들(주한 미국대사 워커의 발언)”이 자신들의 공간에 들어와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영원히 신성한 ‘푸른 눈’으로 기억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철부지 대학생들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로 인하여 ‘푸른 눈’의 절대적 권위는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메리카가 지상 최고의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인들의 의식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후 진행되는 반미운동의 시발이 되기도 했다.
1985년 박정희 식의 ‘조국근대화’를 이어 받아 ‘선진 조국’의 슬로건이 집결된 서울은 해방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와 회색 도시를 압축한 곳이었다. 미국의 것은 지고지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의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규모 국제 행사를 통하여 사회적 인프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선진 조국의 꿈’은 역설적이게도 절대적 성역이었던 미국의 권위를 해체하면서 서울 미문화원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관(대중문화연구소 연구원)

▲ 주한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때 일어난 반미시위대의 모습. 80년대를 대표하는 반미 운동인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은 이후 진행되는 반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김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