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르포

다방 -‘추억’의 문화

마주앉아 인생과 문학과 낭만을 이야기 하던 곳
반세기 넘게 ‘고담준론’의 공간이 되어 온 ‘학림’, 그 수 많은 ‘사색’들은 어디로 갔을까?

학림은 ‘서울대 문리대 제25 강의실’로 불리며 젊은이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던 곳이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온종일 앉아 있어도 눈치 주는 이 하나 없었고 사람들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으며 철학과 문학, 인생을 함께 나누었다.

다방으로 올라가는 굽이굽이 한 계단을 지나오자 눈앞에 70년대 영화 속 한 장면이 펼쳐진다. 책장에는 LP판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투박스러운 통나무 테이블에 국방색 소파에 손님들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손님들의 현대식 옷차림과 선반위에 와인글라스와 수백 종의 와인 병들이 과거가 아닌 오늘임을 보여준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는 손목시계가 무색할 정도로 실내의 어두운 조명은 70년대 암울했던 시대를 꼭 닮아있었다. 유리창을 뚫고 눈부시게 들어오는 가을 햇살이 무색할 정도이다. 학림은 그 역사를 알지 못한 채 보아도 낡고 오래되 보였다.
솔직히 말해 기자는 학림이 서성이고 있는 ‘60년대 언저리의 남루한 모더니즘 시대나 낭만주의와 지사적 저항의 70년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때 살아 보지도 못했거니와 그 시절을 이해하는 데도 인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이곳에서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는 학림이 정신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1956년 개업한 이곳은 전혜린의 에세이에 자주 등장하던 곳이며 김지하 시인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 뿐만이랴. 이청준, 김승옥, 김현, 황지우로 내려오는 한국문학사의 굵직한 거목들을 비롯해 유흥준, 임진택 등 문화예술계의 인사들도 대학시절 강의실보다 학림을 즐겨 찾았다. 이들에게 있어 하루 출발점과 종착점은 다방이었던 것이다.
“학림을 찾는 손님들의 연령대가 참 다양해요. 오늘처럼 햇살 좋은 주말 오후에는 주로 삼, 사십대 손님들이 많이들 찾아오시고평일 오후시간에는 근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이곳으로 모여들죠. 일흔이 넘어 찾아오시는 단골손님들도 많아요. 서울대 문리대 시절 300원짜리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를 기리던 그 추억을 잊지 못하고 찾아 오시는 것 같다.”며 현재의 학림다방 안주인 이정희(46) 씨는 말했다.
대학로 대로변에 위치한 학림은‘서울대 문리대 제25 강의실’로 불리며 젊은이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던 곳이었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온종일 앉아 있어도 눈치 주는 이 하나 없었고 사람들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들으며 철학과 문학, 인생을 함께 나누었다.
한때 학림은 서울대 문리대가 지금의 봉천동으로 이전하고 난 뒤 커피와 클래식 음악만으로는 가게를 꾸려나갈 수 없어 경양식집을 겸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낡은 선반과 쌉싸름한 커피 맛을 잊지 못하던 이들은 학림을 마치 변절자라도 되듯 이곳을 외면해 갔다.
학림이 지금의 분위기를 되찾은 데에는 5대 사장 이충렬(50) 씨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다. 다행이도 자신이 대학시절 이곳을 드나들며 찍어놓은 사진들 덕분에 다방의 옛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릴 수 있었다고.
“몇 해 전에 소파와 액자를 새 것으로 바꿨어요. 근데 젊은 사람들은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하더라구요. 나이 드신 어르신 분들 중에는 간혼 호통 치시는 분들도 계세요. 옛 것을 그대로 지키지 못했다면서요.”

▲ 토요일 오후 2시, 옛 다방에서의 커피 한 잔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한다.

하지만 대학로문화의 상징적 존재인 수필가 전혜린이 자살 전날 앉았던 자리를 그대로 놓아둘 정도로 내부 인테리어를 그대로 보존했다. 이곳에는 나름대로 다락방 같은 2층도 있다. 오르내릴 때 마다 계단이 삐걱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 하지만‘삐그덕’거리는 소리마저 정겨운 것이 이곳만의 매력이다.
70년대는 DJ들이 활약하던‘음악다방’의 전성기였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음악다방은 당시 커다란 문화로 자리 잡았고 도심 한복판의 다방이건 변두리의 찻집이건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심야 음악다방이라는 신종 음악다방이 성행하기도 했다. 대개는 데이트를 하다가 귀가시간을 놓쳐버린 가난한 연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랑을 받았지만 통행금지가 폐지된 80년대 후반부터는 심야 음악다방이 서서히 몰락하면서 그 많던 음악다방들도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과 세대의 변화 속에서 대학로의 문화를 꽃피우던 다른 장소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학다방, 밀다원 다방은 이미 몇 해 전에 문을 닫았고 20년 넘게 자리를 지켰던 클래식 카페 오감도도 사라졌다. 지난해에는 신촌 대학 문화를 상징했던 독수리다방, 일명 독다방이 가게 문을 내렸다. 이문열의 소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소였던 독다방은 신촌 일대 대학생들은 한번쯤은 미팅을 했던 곳이고 가난한 학생들은 커피와 함께 나오는 따끈한 모닝빵으로 허기를 달래던 곳이다. 60~70년대 고담준론의 장으로 문화 사랑방 구실을 했던 옛 다방들이 사라짐이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사람들은 별다방, 콩다방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타벅스와 커피빈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상업적 냄새가 짙게 풍기는 다국적 기업의 체인점과 술집이 작금의 대학로문화인 것이다. 지난날 어머니 아버지가 처음 만났던 그곳, 마주앉아 낭만을 이야기 하던 그 곳은 이제 학림 뿐 인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서울에서 60, 70년대의 추억을 다시 되새겨 볼 수 있는 혹은 경험할 수 있다는 것, 그 것도 슈베르트와 베토벤쯤을 곁들인 한 잔의 커피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문학평론가 황동일의 표현대로‘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처럼’ 학림은 1956년부터 50여 년간 ‘명륜동 94-2번지’를 지켜왔다.
유난히 맑은 토요일 오후 옛 다방에서의 커피 한 잔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한다.
<홍혜승 기자>
lovelovehong@dankook.ac.kr

▲ 책장에는 LP판이 빼곡히 정돈되어 있다.
<홍혜승 기자>  lovelovehong@dankook.ac.kr